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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

by 다작이

누구든 원하는 것 중에 누구도 모르는 게 행복이 아닌가 싶다. 오죽 확신이 없으면 굳이 타인에게서 인정받아야 자신이 행복하다는 걸 느끼겠나 싶다. 그러면 과연 어떻게 사는 삶을 행복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누군가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불만이 없고, 그래서 사는 것 자체가 그저 즐겁고 편안하다면 우리는 그를 일컬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다른 것은 다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어떤 한 가지 일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사람은 어떨까? 그도 어쩌면 어떤 측면에서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 내가 딱 그렇다. 다른 여러 가지 일에는 다소 회의적이더라도 한 가지 일에 빠져 지낼 수 있다는 것, 그것 하나로도 이미 나는 행복하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들은 그 나름 괜찮다. 어차피 이런 일은 대체로 개인의 기호와는 관계없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에 속한다. 이유가 어떻든 피해 갈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물론 나뿐만 아니라 그런 부분들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다. 설령 죄다 불만투성이라도 받아들일 도리밖에 없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다행인지 모르겠다. 비록 만족스러울 정도는 아니라 해도 내가 찾은 언어들로 내 생각을 표현할 수 있으니 최소한 나는 이것으로 숨통은 열어놓을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원고의 마감에 내몰리고 독자의 반응에 지옥과 천국을 왔다 갔다 하는 전업작가가 아니라는 점도 어쩌면 내 행복에 한몫하는 게 아닌가 싶다. 누구보다도 더없이 편한 마음으로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일 테다.


사실상 글쓰기는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일이다. 지금 이 글도 처음 시작했을 때 'ㄴ'을 입력했으니 뒤이어 'ㅜ'가 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입력한 한 글자 한 글자가 어느덧 한 문장이 되는 과정을 낱낱이 지켜본다. 가만히 써 놓고 보니 그 이상 흐뭇할 수 없다. 몇 개의 문장이 모여 문단이 되는 걸 보니 비로소 마음까지 놓인다. 문단은 곧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그 각각의 흐름들이 모여 이내 한 편의 글이 되었다.


얼기설기 덧댄 자국이 더러 드러난들 어떨까? 간혹 앞뒤가 맞지 않으면 또 어떤가? 라이킷의 숫자가 적고 타인이 쓴 글보다 내 글의 조회수가 낮게 나와도 글을 쓰는 내 마음을 흔들지는 못한다. 물론 고심할 이유도 없다. '라이킷'이 적은 것은 내 글이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고 못 쓴 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또 조회수가 적은 것은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의 글을 많이 읽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가는 것이 있어야 오는 것도 있는 법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중요한 것은 쉼 없이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요즘 하루 24시간 중 대여섯 시간 정도 글을 쓰다. 앞에서 내가 글을 쓸 때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고 했으니, 따지고 보면 하루 중의 1/4만큼 행복을 느끼며 사는 셈이다. 즉 25%만 행복하다는 얘기가 된다. 수치상으로는 이 계산이 틀림없지만, 실제로 내가 느끼는 행복의 크기는 거의 80%를 상회하는 것 같다. 75%의 시간을 내가 좋아하지 않거나 싫어하는 일에 투자하고 있는 형편이나, 글쓰기에서 오는 행복감이 상대적으로 행복하지 않은 시간들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평소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가끔은 건축물의 조감도를 들여다보듯 내 위에서 혹은 내게서 멀찍이 떨어져서 나를 바라볼 수 있고, 꽤 많은 경우엔 초고배율의 전자현미경에 눈을 갖다 댄 채 내 세포 하나하나를 관찰하는 것과 같다. 그런 조감과 관찰의 힘으로 이전과는 색다른, 낯선 나를 표현하게 되고, 그 낯섦 속에 나의 스토리를 만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나를 표현할 수 있어서, 그리고 매일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과 기회를 가질 수 있어서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글을 쓸 수 있어서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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