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일기 쓰기의 힘겨움

37일 차

by 다작이

악기를 연주해 보면 어쩐지 손에 익지 않는 것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만약 그것이 관악기인 경우에는 내 숨길과 악기의 구조가 어딘지 모르게 어긋나는 듯 생각될 때도 있다. 왜 그런가 싶어 살펴보면 아직 길들이지 못한 새 악기이거나 아니면 남의 것인 경우이다. 그건 도구를 들고 하는 운동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가령 모처럼 만에 배드민턴을 칠 때 왠지 그립감이 별로거나 자꾸만 손에서 헛돈다 싶으면 내 라켓이 아닌 경우가 태반이었다.


요즘 내가 글쓰기를 할 때 비슷한 생각이 종종 들곤 한다. 원래 내 로망은 손으로 종이 위에 직접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런데 편의상 노트북으로 쓰거나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방식을 선호하게 되었다. 노트북으로 글을 쓰는 건 편집, 저장 등에 있어서 그 어떤 매체보다도 탁월하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일정한 자리가 확보되어야 가능하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이와는 달리 편집하거나 저장하는 데 다소 불편하지만, 언제 어디에서든 글을 쓸 수 있어서 휴대전화로 글을 쓰는 방식을 더 선호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이젠 웬만하면 휴대전화로 글을 쓰게 된다. 무엇보다도 접근성이 좋아 글쓰기에 대한 거부감이 들지 않고, 언제든 어디에서든 또 어떤 자세로든 글을 쓸 수 있다. 주말을 제외한 평일 낮에 쓰는 모든 글은 사실상 휴대전화로 적은 글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요즘 들어 부쩍 손으로 직접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고리타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명색이 글을 쓴다고 하면 손으로 쓴 글이 진짜 글이 아니겠나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지인 중에서 아침마다 한 시간 정도씩 손으로 직접 꾹꾹 눌러 글을 쓰는 분이 있다. 그를 보면 그 어떤 순간보다도 글쓰기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경건해 보일 정도이다. 가지런히 생각을 정리하고 난 뒤 책상 앞에 앉았을 때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 없다고 했다. 노트를 바라보고 있을 때의 모종의 기대감, 그리고 글자가 한 자씩 채워지는 순간에 느끼는 뿌듯함 등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강점이라고 했다. 그런 다양한 감정들에 대한 그의 경험이 부러울 때가 많다.


물론 손으로 글을 쓰면 아무래도 속도는 느려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어쩌면 손의 속도가 시시각각 떠오르는 생각의 그것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건 영원한 난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글은 속도가 관건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후다닥 쓰고 만 글보다는 오래 익히고 묵힌 글이 모로 보나 더 가치가 있지 않을까? 게다가 더 많은 글을, 더 짧은 시간 안에 쓴다는 것도 나름 중요하긴 하겠지만, 글을 쓰는 진정한 맛을 느껴보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일 테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손으로 글을 쓸 수 있는 방법은 뭔지 고민해 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단연 일기 쓰기다. 사실 다른 글은 그렇다고 쳐도 일기는 꼭 내 손으로 직접 종이 위에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다. 어쩌면 전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잠에 들기 30분 전쯤에 모든 채비를 마치고 노트를 펼쳐 쓰기만 하면 된다. 막상 쓰려고 시도해 보면 어떤 소재로 써야 하는지에 대해 가장 많은 시간을 허비하곤 한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어째 그리도 어렵게 느껴질까?


종종 학교에서 일기를 쓰지 않거나 쓰기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왜 일기를 쓰지 않느냐고 물어볼 때가 있다. 귀찮아서 쓰지 못한다는 답변이 압도적으로 많긴 하다. 그런데 의외로 쓸 거리가 없어서 쓰지 않고 있다는 대답도 많이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일기 쓰기는 소재 고갈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는 원론적인 대답만 해 왔다. 그랬던 나 역시 일기를 못 쓰고 있으니 이처럼 어이없는 일이 또 있겠나 싶다.


언제쯤이면 나도 일기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될까? 쓸 만한 소재가 없다는 궁색한 변명에서 벗어나야 한다. 귀찮아하는 마음도 이겨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일기를 쓸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모색해 봐야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내 결대로 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