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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가 없을 때 글쓰기

by 다작이

일반적으로 노래는 곡명이 정해져야 부를 수 있다. 어쩌면 춤도 마찬가지인지도 모른다. 어떤 음악에 맞춰 출 것이냐에 따라 음악은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유독 글쓰기라는 활동은 주제가 없어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심지어 마땅한 소재, 즉 쓸 거리가 없어도 마음만 먹으면 글을 쓸 수 있다. 물론 소재나 주제가 다면 보다 더 효과적으로 글을 쓸 수 있는 건 명백한 사실이긴 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내게 '글감도 없이 어떻게 글을 쓰냐'라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일단은 글을 쓰기 전에 최초의 한 문장은 필요하다. 그래서 이렇게 시작해 보려 한다.

퇴근길에 잠시 커피 전문점에 들렀다.

원래는 소재가 없었는데 이젠 명확한 글감이 생긴 셈이다. 만약 여기에 살을 덧붙이면 대략 이런 식의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퇴근길에 잠시 커피 전문점인 빽다방에 들렀다. 뭐 그렇다고 해서 한 방송인의 팬이라서 거길 가는 건 아니다. 가장 즐겨 마시는 잔의 바닐라 라떼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더러 어떤 날은 지금처럼 나도 모르게 저절로 발걸음이 옮겨지곤 한다. 일전에 친구가 내게 커피도 더 맛있고 분위기도 더 좋은 브랜드 매장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빽다방이냐고 했다. 학교 근처에 있는 유일한 매장이 빽다방이라 그렇다고 했다. 물론 그 외에도 내가 그곳을 자주 들르는 이유는 대략 세 가지 정도가 있는 듯하다.


첫째, 퇴근 후에 곧장 학교를 나서도 시간 활용이 어렵기 때문에 종종 들르곤 한다. 왜관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30분 정도를 정류장에서 기다려야 한다. 지금처럼 폭염이 기승을 부릴 때 땀을 식힐 수 있는 데다 한창 추웠을 때에는 추위를 피할 때 이만한 곳도 없을 정도였다.


둘째, 빽다방은 다른 유명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 매장의 60% 단가로 메뉴를 팔고 있어서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가령 스타벅스에서 한 잔을 마실 비용으로 빽다방에선 거의 두 잔을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이유는 바닐라 라떼 한 잔을 마시면서 한 편의 글을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쓸 수 있다는 점이다. 일과 시간에 일은 하지 않고 글을 쓰는 게 아니냐는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잔잔하게 깔리는 음악은 하루의 찌든 때를 식혀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번째 이유는 다소 예외적인 상황이 발생할 때도 있다. 학교 근처에 매장이 있어서 아이들이 종종 지나가며 유리창 너머로 인사를 하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좀 번거롭긴 해도 이런 경우엔 손을 들어 반갑게 인사해 주면 된다. 또 더러는 안면이 있는 학부모들이 매장 안에 들어올 때도 있다. 잠시 일어나 예를 갖추고 나서 나는 내 할 일을 하면 되니 이것도 방해 요소라고 보긴 어렵다.


오늘은 다행스럽게도 아는 아이들이나 학부모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30분 동안은 나 혼자 오롯이 즐길 수 있는 시간이다. 시선을 유리창 너머로 던진다. 아파트 단지 바로 맞은편에 있는 매장이다 보니 길 건너편은 늘 대형 버스로 북적인다.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하원 차량이다. 4시쯤부터 5시까지 서로 이름이 다른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 온 차량들이 정차할 때마다 아이들을 길 위에 쏟아낸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방금 전 차량에선 내린 아이의 엄마겠다. 한 손을 엄마에게 붙들린 채 주차장 안으로 사라지는 아이도 눈에 띄고, 또 누군가는 근처 가게라도 가려는지 길을 건너는 모습도 보인다.


한 대의 버스가 지나가면 다음 차에 타고 있을 자기 아이를 기다리는 엄마들이 수다를 늘어놓고 있다. 간혹 아빠도 몇 명 있지만, 거의 90% 이상은 엄마들이 아이를 기다린다.

"왜, 아빠가 나왔어? 엄마는?"

십 년도 더 된 오래전에 가끔 내가 아이들 하원 시간에 맞춰 마중을 나가면 우리 아이들이 늘 내게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났다. 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있는 저 여자 아이도 자기 아빠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런저런 모습을 보며 한 모금씩 마시다 보니 어느새 바닐라 라떼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슬슬 갈 시간이 다 되었다는 뜻이리라. 휴대전화를 열어 버스정보시스템을 확인하니 7분 후에 버스가 들어온다는 표시가 떴다. 백팩을 등에 멘 나는 컵을 카운터에 반납하고 매장 문을 나선다.


나는 이런 방식의 글쓰기를 선호하는 편이다. 물론 소재가 별도로 있는 건 아니니 읽을 만하다거나 재미있거나 그러진 않을 테다. 다만 이렇게라도 글을 쓰면 쉬지 않고 글을 써나갈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종종 이렇게 해서라도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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