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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욕하는 고즈넉한 밤

by 다작이

오늘 저녁은 과감하게 운동을 건너뛰었다. 처음 운동을 시작했을 때 무식하게 하루도 쉬지 않고 운동을 했던 탓에 반 년 만엔가 어깨에 탈이 왔기던 적이 있었다. 그것도 전신 무분할 루틴이었다. 건강을 위해 한 운동이 건강을 해치고 만 셈이다. 어까가 다 낫고 난 뒤에 난 욕심을 버렸다. 당장 얼마의 살을 더 뺀다거나 근육량을 얼마만큼 더 늘리겠다는 무지막지한 목표 따위는 세우지 않았다.


물론 루틴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는 없다. 여전히 나는 무분할 루틴을 고수한다. 근육을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니니 유별나게 홀수일은 상체, 짝수일은 하체 등으로 나눌 이유가 없어졌다. 다만 예전처럼 15회씩 7세트를 마쳐야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는 식으로 나를 혹사시키진 않으려 한다. 수행해야 할 동작의 개수도 거의 1/3 수준으로 줄였다. 전신 무분할 맨몸운동(상체 한 가지, 하체 세 가지, 복근 두 가지)을 45분 정도 한 뒤에 트레드 밀에서 25분 간 걷는다. 다시 시작한 운동이 몸에 익을 때쯤이면 이 걷기는 뛰기로 바뀐다.


어차피 다시 운동을 시작할 때 주 5회 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부러 두 번은 빠진다. 무리하면 반드시 탈이 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주중의 운동 휴식일 첫째 날이다. 고작 어제 하루 해놓고는 쉬는 것이지만, 찜찜한 마음은 들지 않는다. 내일이면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어도 헬스장으로 달려갈 테니까.


내친김에 32년 지기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지하철 안에 있으니 대략 40분 뒤면 집에 도착한다. 가면 일단 내가 할 일은 정해져 있다. 바로 족욕이다. 난 매일 저녁에 샤워하기 전에 20분 동안 족욕부터 먼저 한다. 특별히 누가 좋다고 해서 시작하게 된 탓도 있으나, 막상 해보니 피로가 풀리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한의학에서는 상체로 열이 오르고 하체가 차가우면 병이 온다고 한다. 따라서 발을 따뜻하게 해 상체와 하체의 혈액순환을 돕는 게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두 발을 온수에 담그는 족욕은 발을 따뜻하게 하는 데 효과적이다. 족욕을 하면 발의 혈관이 확장돼 상체와 하체의 혈액 순환이 잘 이루어지고, 머리도 맑아진다. 또 가벼운 감기, 두통,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불면증, 신경쇠약 증상을 완화시키는 데도 도움받을 수 있다. 피로 회복과 근육 이완 효과도 있다. ㅡ> 출처: 다음 백과사전, 몸에 좋은 '족욕'하세요 중에서 발췌


이미 한의학에서 그 효능이 입증된 것이라면 족욕의 장점을 의심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좋다고 보증하는데 굳이 내가 뭐라고 토를 달겠는가? 내가 족욕을 즐기는 데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두 발을 세숫대야에 담그고 있으니 어디로든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딱 하나 있다. 바로 글쓰기이다. 발이 고정되어 있어 움직일 수 없고 손만 겨우 사용할 수 있는 상태라면 글쓰기 말고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발을 담그고 있는 그 20분 동안은 글을 쓸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멋진 기회인가?


때로 글이 길어지면 완결될 때까지 족욕의 시간이 늘어나면 그뿐인 것이다. 사실 무엇에 대해서 써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 그냥 말 그대로 생각의 흐름을 충실히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붓(손가락) 가는 대로 쓰기만 하면 된다는 얘기이다. 글쓰기의 목적은 좋은 글의 생산 혹은 글의 완성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물론 그건 나처럼 글을 못 쓰는 사람들을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을 테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그저 쓰면 되는 것이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종종 술을 마시다 보면,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술이 술을 부르는 혹은 술이 사람을 마시는 타이밍이 온다고 한다. 나는 글쓰기도 이치는 같다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글을 쓰다 보면 글이 사람을 쓰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 믿고 싶을 뿐이다. 그때를 맞이할 수만 있다면 그까짓 세숫대야에 발을 담근 채 글을 못 쓸 이유가 뭐겠는가? 어떤 방법과 수단을 써서라도 난 글을 계속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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