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TV를 보다 말고 혼자서 씩씩댄다.
"어떻게 된 게 TV를 틀면 볼 게 없어? 죄다 예능에 트로트에, 이래서 TV를 보는 게 무슨 휴식이 되겠어?"
"싫으면 안 보면 그만이지. 뭘 그리 씩씩거리고 있어?"
그 한 남자가 바로 나다. 물론 맞받아치는 사람은 내 아내다. 나는 귀한 시간 들여서 모처럼 만에 TV를 본다면 뭔가 하나라도 얻는 게 있어야지,라며 생각하고, 내 아내는 소일 삼아 보는 게 TV인데 뭘 그리 의미를 부여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느냐는 입장이다. 그래서인지 가끔 TV를 보다 보면 부딪치기 일쑤다.
태생적으로 TV 보는 걸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나도 가끔은 별생각 없이 볼 때가 있다. 그럴 때 어쩌면 아내의 말처럼 입 다물고 보면 되는데, 그게 잘 되지 않는다. 이런저런 불만도 많고, 괜히 앞에 없는 방송국 사람들을 싸잡아 욕하기까지 한다. 아내의 입버릇처럼 싫으면 안 보면 그만이지 뭘 그렇게 불만이 많냐고 해도 소용없다. TV의 공영성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결코 저런 식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진 않을 텐데, 하며 혼자서 일장연설을 늘어놓게 된다. 이러니 어딜 가든 나는 개꼰대가 되고 만다.
전국을 강타했던 트로트 열풍이 쉬이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시즌 1과 2도 모자라 3편까지 나오기에 이르렀고, 요즘은 거의 보지를 않으니 과연 몇 번이나 우려먹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게다가 무슨 스포츠 경기도 아니면서 남자부와 여자부를 따로따로 진행하기도 한다. 그 많은 오디션들을 통해 적지 않은 스타를 배출했고, 그들 중의 몇몇은 시쳇말로 몸값이 천정부지로 솟아 어마어마한 부를 이루기까지 했다.
노래를 부르며 오디션에 나온 사람은 그렇다고 쳐도 더 가관인 건 심사하는 사람들의 구성이다. 트로트 오디션이면 최소한 현역에서 20년 이상 잔뼈가 굵은 기성 트로트 가수들을 섭외해도 모자랄 판에 개그맨과 개그우먼, 모델, 발라드 가수, 심지어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로 채워져 있는 걸 보곤 한다. 더는 노래만으로 승부하진 않는다는 얘기다. 얼굴도 보고 몸매도 볼뿐만 아니라 종합적인 예능인으로서의 기질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뜻이겠다.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철저히 무시되는 세상을 보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할 정도다.
트로트에 질려 이내 다른 채널로 돌린다.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인 TV 리모컨을 들고 요리조리 돌리기를 하고 있다. 어느새 공인된 타인의 삶이 화면 전체에 걸쳐 적나라하게 출력이 된다. 원래 훔쳐보기, 즉 관음증은 범죄다. 저런 쓰레기 같은 프로그램이 난무한 걸 보면, 누구에게나 관음증적인 본능이 꿈틀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이 반드시 성적인 것과 관련해서 그렇다는 건 아니다. '나는 이렇게 살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라는 호기심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지금 당장 윗집이나 아랫집, 혹은 옆집을 훔쳐볼 수는 없으니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어쨌거나 그건 명백한 범죄다.
그런 대중의 가려움증을 시원하게 해소해 주고 있는 게 바로 요즘의 TV 프로그램이다. 방송국은 타인의 사생활이 궁금한 우리에게, 너무도 궁금하지만 훔쳐볼 수 없는 우리에게 합법적으로 들여다보게 해 준다. 범죄지만, 조금도 범죄 의식을 갖지 않고 마음 편하게 훔쳐보게 해 준다. 심지어 그런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두 팔을 벌려 환영한다. 돈이 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시청률만 확보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셈이다.
"어서 와서 제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신고 안 합니다."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하다. 잠에서 깨어 다시 잠이 들 때까지 24시간 수많은 카메라가 그들을 따라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보여준다.
역시 더 가관인 건 패널들이다. 물론 시청률을 겨냥한 출연진 구성일 테지만, 그들은 시종일관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자기들끼리 웃는다. 타인이 공감하기 어려운 말과 행동들을 하면서 말이다. 너만 고지식하냐는 말을 종종 듣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자기의 사생활을 거리낌 없이 전국에 생중계 방송하고 있는 그들에게, 방송인은 문화를 선도하는 사람들이라는 자부심 혹은 의식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사그라들기는커녕 비슷한 아류작들이 속출하고 있다. 한물이 가다 못해 한동안 TV에서 자취를 감췄던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공개되는가 하면, 당사자 외엔 아무도 모른다는 부부의 속사정까지 전국적인 전파를 타고 있는 지경이다. 심지어 몇몇 사람들은 그들의 자녀들까지 공개해 장차 연예인으로 진출할 교두보를 미리 확보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갖게 한다. 그런 그들에겐 해도 되는 얘기와 안 되는 것에 대한 경계가 사라진 지 오래다. 부끄러움은 물론 기본적인 상식이 있는 건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다. TV를 보고 있으면 점점 바보가 되어간다는 생각만 든다. 안 그래도 생각하기 싫어지는 지금과 같은 때에 말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하다. 아내의 말처럼 보기 싫으면 안 보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