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그루의 사과나무

by 다작이

네덜란드의 유명한 합리주의 철학자인 스피노자를 떠올리면 사과나무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아니다. 어쩌면 선후 관계가 바뀐 것인지도 모르겠다. 식탁 위에 놓인 두세 개의 사과를 볼 때면 사과나무가 떠오르고 그제야 사과나무를 운운했던 스피노자가 소환되는 게 옳은 순서가 아니겠는가? 난데없이 웬 사과나무에, 심지어 생뚱맞게도 스피노자까지 운운하냐고 할 것이다.


누군가가 스피노자에게 내일 당장 세상의 종말이 온다면 지금 무엇을 할 거냐고 물었다. 스피노자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 흘러나왔다. 죽기 전에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했다. 그건 분명 보통 사람이라면 결코 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과연 그래서 한 시대를 풍미하는 철학자, 후세에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힐 만한 저명한 철학자가 되는 모양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정작 이 말은 스피노자가 한 말이 아니라는 설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미 늦고 말았다. 이제는 사과나무만 봐도 자동으로 스피노자가 떠오른다. 잘못된 학습과 기억의 오류 탓이라 해도 별 도리가 없다. 마치 그건 델피 신전 기둥에 새겨진 저 유명한 말, '너 자신을 알라'가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잘못 알려진 것과 다름없는 것이겠다. 아무리 바로 잡으려고 해도 여전히 많은 이들은 그 격언이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알고 있다. 심지어 유명 강사라는 사람도 TV에 나와서까지 그렇게 말할 정도다.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스피노자가 했건 마틴 루터가 했건 간에 이미 내겐 스피노자의 어록으로 기억되어 있다.


만약 나라면 그 순간에 뭐라고 대답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생업에 바빠 그동안 못 가 본 곳에 그때라도 가 보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살면서 응어리가 진 사람들과 미처 풀어내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들을 죄다 털어내고 싶다고도 하지 않았을까? 그도 아니면 못 먹어 본 음식이라도 죽기 전에 실컷 먹어 보겠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종류의 답변을 하든 죽기 전에 한으로 남지 않을 어떤 일을 하며 최후를 맞이하지 않겠나 싶다.


스피노자의 대답은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세상의 종말이 오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것은,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꼭 할 것이다' 혹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내게 주어진 여정을 충실하게 마무리하겠다'라는 결연한 의지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도 아니면 '작은 행위 하나라도 인류에게 보탬이 되는 일을 하겠다'라는 다짐으로 들렸다. 그가 어떤 대답을 했건 간에 그건 아무래도 좋다. 설령 일설에 따라 스피노자가 한 말이 아니라고 했다. 최소한 그의 말로 오인받을 정도라면 원래 그 말을 한 사람도 보통 사람은 아닐 것이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 내가 요즘 말로 굳이 스피노자를 코스프레할 이유는 없다.


아침에 집을 나설 식탁 위에 놓인 사과 두 알을 보았다. 출근이 늦을까 봐 군침만 내내 삼켰다. 저 먹음직스러운 사과가 어디에서 왔는지, 또 누가 저렇게도 잘 길렀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저 사과가 달려있던 사과나무가 있는 곳의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보기까지 했다. 그림, 그중에서도 풍경화엔 완전히 젬병이지만 할 수만 있다면 사과나무가 버티고 선 풍광을 도화지 속에 담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스피노자는, 아니 그가 아니라면 그 어느 누구라도 오늘 내게 훌륭한 글감을 던져 주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스피노자가 그의 방식대로 얘기를 했다고 가정하고, 그러면 이제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얘기할 차례가 된 것 같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온다면 나는 오늘 밤 한 편의 글을 쓰고 있을 것이고, 내일 종말 직전에도 나는 또 다른 글의 소재를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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