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일 차
글을 쓰다 보면 글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미적거릴 때가 있다. 그저 일시적인 현상이라면 잠시 후 다시 집중하면 될 테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자리에서만 맴돌 때도 꽤 있다. 아마도 전반적인 글의 흐름을 놓쳐 그러는 게 아닌가 싶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멈춘 그 자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낱말을 찾지 못한 경우일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글을 쓰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빈약한 자신의 어휘력을 탓하다 글쓰기에 실패하거나 아니면 별로 어울리지 않는 말을 쓰는 바람에 글의 전체적인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마는 일이 될 것이다.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일물일어설을 말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나의 사물 혹은 하나의 상황에는 딱 하나의 안성맞춤인 단어가 있다,라는 말이라고 한다. 사실 놀라운 얘기가 아닐 수 없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최소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알맞은 단어를 찾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업이 되는 셈이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보바리 부인』을 쓴 소설가로서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을 창시했다는 평을 받고 있는 소설가다. 그런 반열에 있는 사람이 한 말이니 그만큼 그의 말에 무게가 더 실리지 않을 수 없는 듯하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실주의 문학이란 '초연함과 객관성, 정확한 관찰을 강조하고, 사회환경과 관습을 명쾌하면서도 절도 있게 비판하며, 도덕적 판단 밑에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깔려 있는 문학을 지칭한다며 다음 백과사전에 나와 있다. 정확한 관찰이나 절도 있는 비판 등이 이루어지려면 그걸 가장 알맞게 표현할 수 있는 낱말이 필요하다는 건 자명한 이치겠다. 결코 두 가지나 그 이상의 단어가 동원될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결국 플로베르가 한 말은 이런 식으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나의 사물이나 특정한 상황을 글로 표현하는 데 있어서 어울리는 단어(낱말)는 하나밖에 없다.
그렇다면 글쓰기라는 것은 그때그때에 딱 필요한 단어를 찾아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가령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다가 화가 나는 상황을 겪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때 그저 단순하게 '화가 났다'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 식상한 감이 없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열받았다'라고 표현하려니 어딘지 모르게 표현에 격이 떨어진다. 물론 '뚜껑이 열렸다' 혹은 '스팀을 받았다'라고 표현하려니 아무리 봐도 이건 더더욱 아닌 것 같이 여겨진다. 전자는 다소 저속하게 느껴지고, 후자는 부적절한 외국어가 사용되어 더더욱 문장의 격이 떨어진다. 이때 바로 우리가 매우 크게 화가 나게 된 그 상황에 대한 순간적인 감정을 어떤 단어로 표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점에 봉착하게 된다.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를 찾아서 써넣을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그런 일을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솔직히 플로베르의 말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나 역시 소설을 쓴답시고, 또 이미 쓴 소설을 퇴고한답시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가며 글을 쓰거나 다듬기를 늘 반복한다. 이때 사실상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미 썼던 표현 중에서 어색한 부분은 삭제하고, 더 잘 어울리는 표현을 그 자리에 대체하는 식으로 작업이 이루어진다. 또 상황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더 적당한 단어를 찾아 바꿔 쓰는 형태로 이루어지곤 한다. 결국 내 글쓰기는 늘 단어 선택을 두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일에 다름 아닌 것이겠다.
플로베르의 말이 그래서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게 아닌가 싶다. 즉 어떤 사물이나 상황 등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적확한 단어를 찾아 적을 때 가장 좋은 글이 나온다는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건 결국 글을 쓰는 사람이 얼마나 풍부한 어휘력을 가졌느냐에 따라 작품 혹은 글에 대한 성공 여부가 좌우된다는 얘기겠다.
결론적으로, 글을 잘 쓰려면 어휘력을 기르기 위한 별도의 훈련이 필요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좋은 책을 고르고 또 골라 부지런히 읽고 익혀야 하는 이유가 아니겠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