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일 차
시내 중고서점에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큰 소리가 들렸다. 일단 목소리만 들어도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 내는 소리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돌로 만든 벤치 위에 놓인 2개의 테이크아웃 커피 빈 통 때문에 벌어진 일인 것 같았다.
"처먹는 놈 따로 있고, 치우는 놈 따로 있나? 하여튼 요즘 젊은것들은……."
소위 주위에 있던 젊은것들(?)이 일제히 그 노인을 쳐다보며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다들 뜬금없이 튄 불똥에 적지 않게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있으려니 근처에 있었던 또 다른 나이 든 사람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보태기 시작했다. 우리 아파트에는 실컷 처먹고 엘리베이터 측면 손잡이 위에 버려두고 가는 놈들도 있다느니, 가정교육이 어떻게 되었기에 애 새끼들이 이 모양이라느니, 여기에 이런 걸 버려두고 가는 놈들은 단체 생활을 할 자격이 없다느니 따위의 말들이 오고 갔다. 심지어 젊은 놈들이 이 모양 이 꼴이니 나라가 이 꼬락서니지, 하며 애먼 나라 탓까지 했다.
그들이 내뱉는 말들이 일견 맞는 부분이 있다고 쳐도, 그들이 자아내는 풍경은 가히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우선은 그 빈 통을 버린 사람들이 과연 그 노인이 말한 것처럼 젊은 놈들이 확실한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극과 극은 통하는 법이다.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편의대로 행동하는 걸로 따지면 나이 든 사람이 젊은 사람 못지않다는 걸 심심찮게 보곤 한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장소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 누군가를 두둔하려는 게 아니다. 이미 벌어지고 만 일이었다. 그 노인이 불쾌했다는 건 충분히 인정할 만하나, 그림이 좋으려면 맨 먼저 그 모습을 본 그 노인이 묵묵히 치우는 것이 아니겠나 싶었다.
물론 그가 처음으로 그 광경을 봤을 리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더 많은 사람들이 보고도 외면했으리라. 자신의 손에 오물을 묻히는 것도 탐탁지 않았을 테고, 어차피 청소하는 인력이 와서 치울 거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솔직히 나였어도 먼저 나서서 치웠을지는 장담할 수 없을 것 같다. 사실 그가 굳이 그걸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이유는 없다. 애초에 그걸 그렇게 공개적으로 유기해 놓은 사람의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뻔히 보고도 버리지 않는 그를 탓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때 문득 옆을 지나치던 젊은 사람 두 명이 한 마디 내뱉고 갔다.
"에이 씨발, 개꼰대들!"
무례한 누군가가 버리고 간 쓰레기를 대신 치워줄 정도로 훌륭한 일을 해낸 노인에게 할 말은 분명 아니었다. 그때 문득 꼰대라는 말이 강렬하게 귀에 와 박혔다.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꼰대라는 말 정도는 의미를 알고 있긴 하나, 내친김에 정확히 무슨 뜻인지 찾아보았다.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해서 남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 이런 걸 속된 말로 '꼰대질'이라고 한다. 그렇게 보면 꼰대는 꼭 나이가 많아야 하는 건 아니다. 정치성향과 이념성향이 특정한 쪽에만 꼰대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하루하루 버텨내기 어려운 20대들에게 선배가 되어줄 자신이 없으면 꼰대질은 하지 않는 게, 현재 20대가 겪는 불안감 가득한 세상을 만든 선배 세대가 갖춰야 할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싶다. ☞ 2015년 1월 21일 <뉴스타파> 김진혁의 칼럼 <꼰대 vs 선배> 중에서
이 표현에 따르면 그 노인은 명백한 '꼰대질'을 한 사람이 되고 만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꼰대질을 지속적으로 하는 사람, 혹은 그 정도가 지나친 사람이 바로 '개꼰대'가 되는 것이다. 분명 노인의 표현에 문제가 있는 건 사실이다. 그 광경을 연출한 누군가를 직접 목격하지 않았으면서도 그는 일종의 일반화의 오류를 범한 셈이었다. 사정이 그렇다면 아무리 그럴듯한 지적을 했다고 해도 꼰대라는 낙인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으로는 아무리 옳은 일이라고 해도 타인에게 이런저런 지적을 받는 것이 얼마나 싫었으면 이런 표현이 생길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됐네요. 너나 잘하세요."
꽤 인기가 높은 한 여배우가 출연한 어느 영화인가 드라마에서 나온 대사다. 이 단순한 한마디의 말은 유행어가 될 만큼 숱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물론 요즘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사람들은 이제 변해 버렸다. 예전처럼 정이 많은 시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가 당신에게 관심을 끊고 간섭하지 않듯, 당신도 내 일에는 관심을 접고 당신 일이나 잘하라는 말이었다. 특히 요즘의 MZ 세대들에게 이런 모습은 거의 보편화되어 있다시피 할 정도다.
물론 옳지 않은 말이나 행동에 대해 타인으로부터 지적을 받는다는 게 달가울 리는 없다. 그러나 그 지적을 받는 사람이 상식적인 차원에서의 사고가 가능한 사람이라면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하고 충고를 받아들여야 할 테지만, 이미 그런 것을 요구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가 버린 것 같다.
꼰대의 반대말은 비꼰대가 아니라 어른이라는 말이 있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어른이 아닌 것이다. 어른이면 어른다운 언행과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얘기겠다. 나이에 걸맞은 체통과 품위는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제때에 갖추어지는 것도 아니다.
참 씁쓸하고 또 삭막하기 그지없는 세상이다. 그렇다고 마냥 세상 탓만 하고 있을 순 없다. 변화해 가는 시대에 맞게 살아가는 것도 어쩌면 꼰대가 아닌 어른이 갖추어야 하는 자질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