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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흐린 날

사백 일흔다섯 번째 글: 발걸음이 빨라집니다.

by 다작이 Mar 0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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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만에 느지막하게 일어나 하루를 여유 있게 시작했습니다. 집에 와 있는 아들과 함께 아침 겸 점심을 챙겨 먹었습니다. 식탁에 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오십 대 중반의 아빠와 이십 대 초반의 아들이 뭘 그리 재미난 대화를 할까 싶지만, 서먹서먹한 틈을 메워가던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평소에는 볼 일이 없던 TV까지도 오늘은 우리의 화젯거리가 되었습니다.


내일이면 자대로 복귀해야 하는 아들에게 집에서 쉬라고 해 놓은 뒤 저는 여느 때처럼 노트북이 담긴 백팩을 메고 집을 나섰습니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이럴 때는 냉정해야 합니다. 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집에 있게 되면 오늘 하루는 마냥 시계만 쳐다보다 소일하고 말 게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니까요.


방금 전 작은 빗방울 하나가 손등에 떨어진 것 같았습니다. 벌써 이러면 안 되는데 싶은 생각에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오늘 들어 처음으로 쳐다본 하늘입니다. 제 시야에선 늘 하늘이 보이는데도 말입니다. 그리 바쁠 것도 없는 오늘 하루였습니다. 그래 봤자 쉰다는 명목으로 여기저기 쏘다니는 게 오늘 제가 한 일의 전부였습니다. 우스갯소리로 백수가 과로사한다더니 괜히 바쁜 척한 모양입니다.


안 그래도 3월의 시작과 함께 전국적인 눈이나 비 예보가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이틀 전엔가 저녁 뉴스에서 본 기억이 났으니까요. 예보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신학기 시작부터 궂은 날씨를 봐야 하냐고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습니다. 뭐랄까요, 마치 주중에는 짱짱한 날씨가 이어지다가 뭔가 특별한 일을 하려는 주말 동안 비가 쏟아붓듯 말입니다.


이럴 때면 으레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비나 눈을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터무니없는 욕심을 가져 봅니다. 집에 도착해서야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쏟아지든 말든 상관없습니다. 밖에 돌아다닐 때만큼은 피하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니까요. 막상 말해 놓고 보니 웃기는 소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일개 하찮은 인간인 주제에 감히 하늘의 운행을 쥐락펴락 하려 합니다.


하늘을 휴대전화 카메라에 담아 봅니다. 언뜻 구름 같은 게 보이는 듯도 합니다. 아니 어쩌면 온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큰 구름 하나가 내걸린 것 같기도 합니다. 하늘 양쪽에서 그 큰 구름을 잡아당긴 듯 말끔한 구석이라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도화지를 하나 펼쳐 온통 회색으로 칠한 건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어찌 하늘이 온통 회색으로 물들었을까요?


어느새 그 회색이 잿빛으로 변합니다. 사방이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습니다. 또렷이 보이던 사물의 형체가 흐릿해져 갑니다. 이러다 곧 사위는 온통 검은색으로 물들겠지요. 오후와 저녁을 가르는 경계선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이미 하늘이 그 선을 넘어선 듯합니다. 빠른 속도로 어두워지고 있는 하늘을 보며 발걸음이 점점 빨라집니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 올랐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하늘에선 별다른 기별이 없습니다. 한 삼십 분만 더 견디면 집에 도착하게 됩니다. 누군가가 빗자락을 움켜쥐고 있다면 조금만 더 버텨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비가 쏟아지기 직전에 무사히 들어갈 수만 있다면 오늘 하루는 꽤 성공적으로 보낸 셈이 될 겁니다.


내친김에 공식적으로는 벌써 끝나 버린 봄방학 기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되돌아봅니다. 대략 삼 주가 넘는 시간이었습니다. 사실상 학교와 집을 오가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신학기 개학을 앞두고 괜스레 마음이 바빴으니까요. 어쨌건 간에 큰 변수 없이 매일 글을 쓰겠다는 다짐을 지킨 것 하나만 해도 의미 있게 보낸 시간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사진 출처: 글 작성자 본인이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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