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얼마 전에 어느 지인과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그때 마침 나는 우리나라 소설가가 쓴 소설을 읽고 있었다.
"혹시 지금 무슨 책 읽고 계세요?"
"아, 이문열 씨가 쓴 소설 '아가'를 읽는 중입니다."
"소설을 좋아하시나 봐요?"
"네, 시간 날 때 종종 읽곤 합니다."
사실은 나도 소설을 쓴다,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괜스레 도둑이 제 발 저렸다고나 할까?
"좋아하는 소설가는 누구예요?"
"J.R.R. 톨킨, 마쓰모토 세이초, 마루야마 겐지, 그리고 나쓰메 소세키입니다."
막상 시원하게 대답해 놓고는 아차 싶었다. 왜 거의 대부분이 일본 사람이냐며 의아해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 빼고는 다 일본 사람이네요."
아니나 다를까, 곧장 의문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그를 보며 괜히 내가 죄를 짓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필이면 일본 사람을 좋아하게 된 이유를 밝히려니 어딘지 모르게 변명하는 듯한 느낌을 줄 것 같았다.
"우리나라 소설가는 좋아하는 사람 없으세요?"
순간 나는 당황했다. 좋아하는 정도라고 하면 두세 명 정도 있지만, 존경하는 국내 소설가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으니 그냥 대답하면 그뿐이었다. 마치 없는데 억지로 쥐어짜 내듯 몇 명의 이름을 둘러대려 해도 그것 또한 여의치 않았다. 결국 하필이면 존경하는 소설가가 모두 일본인이라 변명 아닌 변명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가끔 왜 내가 존경하는 소설가는 모두 일본인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곤 한다. 뭐, 뻔하지 않은가? 그들의 작품이 그저 좋을 뿐이고, 읽을 때마다 내게 영감을 주는 것은 물론 그들의 작풍을 본받고 싶기 때문이다. 사실이 이러니 어딜 가든 누가 물어오면 솔직하게 대답하기가 참 곤란할 때가 많다. 기껏 대답을 해봤자 쥐뿔도 없는 주제에 잘난 척한다는 오해를 받는 건 기본이다. 하다 못해 넌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냐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뭐라고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봤다. 개인의 기호에도 애국심을 운운하는 듯한 태도가 마뜩지 않지만, 그 정도의 오해나 곱지 않은 눈초리는 기꺼이 내가 감수해야 할 부분이다.
꽤 오래전에 어느 신문기자가 유명 바둑 기사에게 존경하는 기사가 누구냐고 물었던 기억이 났다. 그는 마치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딱 두 명의 이름을 거론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중국인이었다. 그냥 그런 줄 알고 넘어가면 될 텐데, 이내 기자는 우리나라 기사 중에서는 존경하는 사람이 없냐고 물었다.
"네, 없습니다."
보도가 나간 뒤 그는 사람들로부터 꽤 오래 비난 아닌 비난을 들어야 했다. 당대 최고의 실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네가 그렇게 잘 났냐?'라는 비아냥 섞인 말까지 들어야 했다. 나 역시도 그를 이해할 수 없었는데, 그때 그가 왜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된다고나 할까?
명색이 존경한다는 말을 갖다 붙이려면 글을 쓰는 데 있어서 최소한 본받고 싶은 구석은 있어야 하는 법이다. 게다가 그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의 취향에 따라 결정될 일이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우리나라 소설가만 좋아해야 하는 건 아닐 테다. 물론 국내의 작품들 중에서 내가 본받고 싶은 데가 있는 소설가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얼마든지 괜찮은 이들이 있긴 하나 그들에게 필적할 만한 사람들이 없다는 게 문제겠다.
솔직히 앞에서 열거한 세 명의 일본 소설가와 한 명의 영국 소설가의 작품을 읽을 때면 난 전율을 느끼곤 한다. 마치 무더운 한여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쓴 것 같다. 그들(J.R.R. 톨킨. 마쓰모토 세이초, 마루야마 겐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들은 읽을 때마다 설렘과 떨림을 느낀다. 몇 번이나 읽은 뒤라 이미 스토리를 훤히 꿰고 있는데도 말이다.
나는 소설을 읽을 때 딱 하나의 기준을 갖고 그 작품을 평가한다. 완독하고 난 뒤에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느냐 안 드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 나만의 관점에서 보자면 존경할 만한 우리나라 소설가는 없다는 것이다. 거만하다고 해도 혹은 재수 없다고 해도 할 수 없다.
사실 문학이라는 것은 또 예술이라는 것은, 특성상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 않다. 그 말은 곧 각자가 생각하는 예술의 기준이 충분히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읽을 때 깊은 예술성이 느껴지지 않는 작품이라면, 그건 내게 이미 예술이 아닌 것이다. 그저 단순히 시간을 때우기 위한 오락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내게도 언젠가는 존경하는 우리나라 소설가가 생기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