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는 데에는 정답이 없다는 말을 자주 듣곤 한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면서 늘 살아간다. 누구와 살아가더라도 사람들이 사는 일반적인 틀을 벗어날 수 없고, 어떤 환경에 놓이든 비슷한 궤적을 그리며 살아갈 테다. 사는 동안 꽤 많은 근심거리를 돈이 해결할 순 있어도 부유하다고 해서 걱정 없이 살 순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렇게 보면 이 삶이란 건, 그 어디에서도 아등바등할 이유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실컷 그렇게 호기롭게 얘기할 때는 언제고, 정말 그럴까 하며 의심에 찬 눈빛을 띠게 된다.
그래도 그 어딘가에는 보다 더 잘 살아가기 위한 묘책이 있지 않을까 하는 허황된 생각을 품은 게 아닌가 싶다. 다양한 매체에서 소개하고 있는 '잘 사는 방법'에 대한 글과 영상을 보기도 한다. 사실 지금보다 더 윤택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는 바람을 갖는 게 어찌 과하다고 하겠는가? 그런 욕심이라도 부리며 사는 게 사람이 아니겠냐며 어느새 나를 두둔하려 한다. 잘 살려면 더 열심히 사는 것 외엔 그 어떤 해결책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끔은 더 빠른 길을 찾으려는 나 자신의 어리석은 생각을 달래기도 한다.
그런 내 생각의 도가 지나칠 때마다 한 번씩 나를 붙들어 매는 게 있다. 이러고 있는 나도 언젠가는 죽음을 맞닥뜨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어느덧 오십 대 중반에 들어선 내게 사람의 죽음에 대해 뭔가를 가르쳐 준 계기는 딱 두 번 있었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물론 그 사이에 무수히 많은 이들이 이 세상을 살다 갔지만, 당신들의 그것만큼 내게 충격을 준 것 없을 터였다. 두 사람의 죽음을 보고 겪으면서 사람의 삶과 죽음이 참 덧없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솔직히 하나 마나 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제아무리 아등바등 버티며 살아도 갈 순간이 되면 순식간에 가버리고 마는 게 사람의 운명이었다. 최소한 내 부모님들은 내게 몸소 그걸 보여주셨다. 특히 지금 같이 추석이나 설을 앞두고 있으면 더더욱 그런 생각에 젖게 된다.
아버지는 정확히 6년 전에 돌아가셨다. 의사는 항암치료는 말할 것도 없고 수술도 필요 없다고 했다. 길면 1달 반이라고 했다. 말로만 듣던 시한부 판정을 받은 것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마냥 손을 놓고 그때까지 기다리는 것 외엔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남은 시간이 도대체 어떤 기준에서 나온 건가 싶었다. 1달 반은 고사하고 아버지는 단 한 주도 버티지 못했다. 마치 거짓말처럼 바로 그다음 날 오후 늦게 돌아가셨다. 그동안 암으로 떠나는 사람을 적지 않게 봐왔지만, 아버지처럼 사망 전날에 진단받은 경우는 한 번도 보지 못했었다.
안 그래도 서로 정이라고는 없던 관계였다. 슬픔이 온몸을 휘감을 정도는 아니었다고 해도 엄연히 내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슬픔의 깊이를 논하기 전에 죽은 자에겐 그가 가야 하는 길이 있고, 산 자는 또 그 나름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게 커다란 모순처럼 여겨졌다. 그나마 빨리 추스를 순 있었던 건 아버지보다 4년 먼저 어머니를 보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슬픔의 정도나 상실감은 아무래도 아버지보다는 어머니 때가 더 컸다. 그건 아마 나중에 아내나 내가 죽고 난 뒤에 우리 애들이 받아들이게 될 감정의 크기와 같지 않을까?
모든 건 한순간이었다. ‘찰나’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릴 정도였다. 그 어떤 말도 그 순간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불과 삼십 분 전까지만 해도 이런저런 넋두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에 말도 그치고 숨 쉬는 것도 내려놓았다. 죽는 그 순간엔 분명히 고통스러웠을 텐데, 눈을 감은 그 모습이 그처럼 평화로울 수 없었다. 살아있을 때 그렇게도 지지고 볶고, 때로는 호통을 치거나 감정적으로 대립하기도 했던 아버지였다. 다른 사람은 다 고꾸라져도 당신만큼은 결코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감히 대적할 수 없을 만큼 큰 산 하나가 내 눈앞에서 허물어져 가는 걸 보면서 삶의 실체를 또렷하게 목격했다고 하는 게 가장 맞는 표현이 아니겠나 싶다.
한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살아있던 아버지가 한 줌의 재로 변하는 데에는 고작 두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그 큰 덩치의 사람이 단 한순간에 한 줌의 재로 변하게 될까? 늘 실체로 대하며 살아왔던 한 인간의 '생과 사'라는 것이 마냥 덧없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오늘도 온갖 몸부림을 치며 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언젠가 한 줌의 재로 변할 그 짧은 시간이 내게는 오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