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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많은 사람들

by 다작이

오늘 같은 날은 하늘에 구멍이라도 하나 났으면 좋겠다 싶었다. 맑은 날씨도 아니고, 그렇다고 많은 양의 비를 퍼붓는 것도 아닌 날씨였다. 이도 저도 아닌 참 애매한 날씨 속에서 하루를 관통하려니 만만치가 않다. 어디를 가든 손에 든 우산 때문에 거추장스럽고, 우산을 든 왼손 때문에 오른손으로 모든 걸 해야 하는 것도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


한참 전부터 비는 계속 오고 있다. 아쉬운 건 비 올 때마다 늘 동반되곤 했던 바람이 오늘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내에 있으니 눅눅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는 것 같아 무기력해지기 딱 좋은 것 같다. 바람이라도 쐬려고 실외로 나가봐도 별다른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오늘은 공기의 순환도 잘 안 되는 하루인 듯하다.


이 정도 비면 우산 없이도 충분히 돌아다닐 수 있지만, 가방에 책이라도 들어 있다면 흠뻑 젖기에 딱 좋을 만한 그런 날씨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우산을 들고 다녀야 한다. 어딘가에 들어가면 일단 물기부터 털어내야 하고, 우산을 둘둘 말아 똑딱이 버튼으로 고정해야 한다. 고스란히 손에 묻어난 물기는 청바지에 쓱 문질러 닦는다. 그러고는 휴대전화를 꺼내어 쓰던 글을 다시 불러들인다.


어디까지 썼더라, 하며 그때껏 써놓은 글을 다시 읽어본다. 명색이 글이라면 매끄럽게 연결되어야 하는데, 정신이 흩어져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는다. 밖은 비가 와서 정신이 사납고, 그건 실내에 들어가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난리를 피하려고 잠시 모여든 사람처럼 다른 때보다 더 소란스러웠기 때문이겠다.


얼마 간 더 버티고 있다가 더 늦기 전에 집으로 가고 싶었다. 지하철 개찰구에서 교통카드를 찍고 승강장으로 들어서니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마침 바로 앞의 역이 대구에서 가장 혼잡한 동성로이니 문이 열리면 아마도 더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지하철 좌석에 앉아 조금 전까지 쓰던 글을 이어서 쓴다. 내 왼쪽에 앉은 나이가 지긋한 여자분은 계속 팔꿈치로 나를 치고 있다. 팔을 올리면서 치고, 또 내리면서도 어김없이 가격한다. 물론 미안하다는 표시나 눈빛 한 번 주지 않는다. 시쳇말로 '쩍벌'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최대한 웅크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오른쪽에 앉은, 역시 나이가 나보다 열 살은 더 많아 보이는 남자분은 습기로 눅눅해진 자신의 팔뚝이 내 팔에 닿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큰소리로 통화하는 매너 없는 여자분, 게임 소리가 맞은편에 앉은 사람에게까지 들릴 정도로 해놓고 정신을 팔고 있는 개념 없는 남자분, 그리고 몇 미터 떨어져 있는 경로석에서 한참 전부터 트로트 메들리를 틀어놓고 있는 정신 나간 남자분, 신경 안 쓰면 그만인 그들의 몰상식한 행동에 불길 같은 분노가 일어나려 한다. 어쩌면 이 모든 화의 기운이 비 때문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어떤 한 남자는 주변 사람들이 듣고 있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막말까지 쏟아낸다. 뭘 보고 그러는지는 몰라도 그는 난데없이 '세상 말세'라고 했다. 우리가 언제부터 해외여행을 다닌 거냐며 연휴 기간에 해외로 나가는 사람들을 무분별하고 몰상식한 사람들이라고 몰아세웠다. 제주도 행도 이미 만석이라며 '비행기가 추락해서 몇 백 명은 뒈져봐야 정신을 차릴 거냐'라는 말까지 쏟아냈다. 사람들이 힐끗 쳐다봐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누가 있든 없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반드시 해야 하는 세상이 되어 버린 걸까?


나를 포함한 일부 몇몇 사람들만 정상이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이상한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나까지 이상해질 것 같은 눅눅한 저녁을 보내고 있으려니 나 또한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 것 같다. 날씨가 이상하니 사람들까지 이상해지고 있는 걸까? 이대로 앉아 있으면 나 역시 누군가에게 밑도 끝도 없는 화풀이를 하고 말 것 같았다.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다 같이 맞이한 연휴, 누군가는 더 누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덜 누리는 것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 때문일까? 결국 무엇을 하든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하리라. 이럴 때는 얼른 집에 가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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