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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나눌 상대

by 다작이

잠시 볼일이 있어 시내에 가려고 지하철을 탔다. 여섯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자리마다 꽉꽉 채우고 열차는 달려간다.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으나, 더러는 일행으로 보이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는 듯하다. 그 누구와도 대화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어도 두세 사람이 얘길 나누는 모습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간혹 얘길 주고받는 사람들이 있긴 한데 그마저도 죄다 연배가 꽤 있는 분들밖에 없다. 지하철이 처음 생겼을 때만 해도 이 정도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적막한 분위기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시쳇말로 이젠 서로에게 '안물안궁'인 시대가 되고 말았다. 어느 정도의 친밀감이 있는 지인의 근황도 궁금하지 않다. SNS에서 보는 일면식도 없는 타인 외엔 누구의 일상도 그들에게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다. 서로에 대해 관심이 없으니 얘기할 거리도 없고, 막상 자리가 마련되어 여러 사람이 한자리에 둘러앉아도 각자가 휴대전화만 들여다볼 뿐이다. 휴대전화만 있다면 혼자서도 얼마든지 온종일을 무료하지 않게 보낼 수 있는 시대가 아니던가? 아마도 언젠가는 사람들 주변엔 아무도 남지 않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누가 옆에 있건 간에 각자 자기가 즐겨 듣는 음악을 고르고 좋아하는 분야와 관련 있는 다양한 영상들 본다. 하루 온종일을 봐도 시간이 모자랄 것이다. 그러니 옆에 누가 있다고 해서 무슨 도움이 될까? 몇몇은 게임에 흠뻑 빠져 있고, 어떤 이들은 귀에 인이어를 꽂은 채 드라마를 보느라 여념이 없다. 간혹 누군가는 전자책을 읽거나 웹툰을 보기도 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도대체 누구와 대화를 나눌 마음이 생길까? 아마도 굳이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을지도 모른다.


이제 더는 그런 세상을, 또 세태를 탓할 수만 없다. 냉정하게 얘기해서 타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혼자사 시간을 가지며 여유롭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게 더 유익한 듯 느껴지는 세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반드시 누군가와 말을 해야 하는 절실한 이유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사실 디지털이 대세가 아니던 시대엔 사람들의 대화가 살아가는 데 있어 큰 비중을 차지했다. 마주 보는 사람과의 정서적 교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또 중요한 정보를 교환하는 데에도 대화는 훌륭한 역할을 해왔다. 그래서 사람이 있는 곳이면 으레 대화가 흘렀다. 어쩌면 이건 동물 중에서 유일하게 말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말을 잘하던 사람들이 점점 입을 닫는 세상이 되어간다.


서로 마주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음


사전에서 정의하는 ‘대화’의 의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마주한다는 것’과 ‘주고받는다는 것’이다. 분명한 건 최소한 이 두 가지는 혼자서 할 수 없다는 특성이 있다. 일단 ‘마주한다는 것’은 내가 누군가를 보고 있다면 그 사람 역시 나를 보고 있어야 한다는 걸 전제로 한다.

다음으로 ‘주고받는다는 것’도 내가 누군가에게 뭔가를 주면 받는 사람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때 누가 주는 사람이냐 혹은 받는 사람이냐 하는 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혼자서는 주고받을 수 없다는 그 사실이 가장 의미 있을 테다.


자, 그러면 이제 주변을 한 번 둘러볼까? 서로가 마주하고 있거나 뭔가를 주고받거나 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는 걸까? 그런 점에서 우린 우리의 지인들과 원활하게 대화가 잘 이루어지고 있을까? 이젠 바야흐로 혼밥, 혼술이 대세인 시대가 되었다. 외로운 게 더는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외로움을 느끼기엔 한창 혈기왕성한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는 데다, 자신은 결코 늙지 않을 거라는 굳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혼자라서 외로운 게 아니라 오히려 혼자이기 때문에 그만큼 더 편한 세상이 되어 버린 지 오래이다.


주변의 어느 누구도 한가한 사람이 없다. 게다가 전혀 바쁠 것 같지 않은 사람도 입만 열면 바쁘다고 한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우스갯소리가 괜히 있는 말이 아닌 모양이다. 다들 그렇게 바쁘니 어떤 일을 하려 해도 서로 시간을 맞추는 게 쉽지 않다. 마치 무슨 난제를 푸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물론 그렇게 가까스로 시간을 내어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와도 그 발걸음은 무겁다. 혼자 있을 때의 편안함에 이미 취해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세상은 혼자서 살아가는 공간이 아닌데도, 이젠 혼자서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데 더 익숙해져 버렸다. 마치 수많은 테이블이 마련된 대형 식당에서 자리마다 한 사람씩 앉아 벽만 쳐다보며 식사하는 것 같은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 느낌이다. 적어도 대화가 이루어지려면 누군가와 동석 혹은 합석을 해야 하는데, 시대 자체가 이것을 거부하고 있다. 오죽하면 웬만한 식당마다 혼밥족을 위한 별도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을 정도니까.


필요한 경우 외에는 모두가 침묵하며 살아가는 게 올바른 삶의 태도처럼 여겨진다. 딱 필요한 몇 마디 외에는 그 어떤 말도 필요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누군가와 대화를 시도해도 상대방이 그것을 원하지 않을 때도 적지 않다. 가령 어떤 직장에서 회의를 한다고 가정해 보겠다. 회의를 소집하는 관리자들은 그 역시 대화의 장이라고 간주하지만, 참석자들은 이런 상황을 두고 대화하고 있다는 인식을 하지 않는다. 그건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전달에 더 가까운 행위일 뿐이다. 대화는 두 사람 이상이 마주 보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상황에서만 발생한다. 가장 최근에 마음이 흡족할 만큼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언제였는지 떠올려 보라. 게다가 그 대화가 마음을 터놓을 정도의 진솔한 대화였느냐는 전제 조건을 단다면 당신은 얼마나 자신 있게 그런 적이 있었다며 대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일전에 TVN 채널에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방영했던 적이 있었다. 첫 회부터 최종 방영분까지 본방송을 모두 시청한 것은 물론이고, 그 뒤로도 몇 차례 방영한 재방송분도 빠짐없이 봤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의 기억에 취해 있었던 탓이겠다. 설령 돌아간다고 해도 결코 그때처럼 똑같이 반복될 리 없는, 그 따뜻한 인간적인 삶의 모습이 그리웠다고나 할까? 결국 내가 그 드라마를 본 이유는 과거에 대한 향수 때문이었다. 아무리 설정된 드라마라고 해도 인간미를 물씬 풍기며 살았던 그때 그 시절이 너무도 그리웠다. 어쩌면 우리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 게 아닌가 싶다. 이제는 어떻게 해도 과거로, 그때의 그 소중했던 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테니까.


입은 말하라고 있는 신체 기관이다. 아무리 AI가 1인 가구의 외로움과 적적함을 달래주는 획기적인 발명품이라고 해도 사람의 자리를 대신할 순 없는 법이다. 서로 활발하고 원활하게 대화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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