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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

71일 차

by 다작이

빈말이 아니라 솔직히 다른 사람이 날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일이 거의 없다. 마찬가지로 나를 일부러 괴롭히거나 험담하는 사람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나라는 사람이 겉으로 봤을 때 무섭다거나 혹은 위협적인 사람으로 보여서 그런 게 아니다. 그리 반가운 얘기는 아닌데, 난 철저한 아웃사이더이다. 그런 말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요’라고 할 수 있고, 또 모두가 ‘아니요’라고 할 때 ‘예’라고 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어딜 가든 나는 의도치 않게 문제를 몰고 다니는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피곤하기 짝이 없다는 말이겠다. 더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사람들이 은근히 싫어하는 타입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싶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내가 근무하는 직장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를 꽤 어려워하는 편이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내 입장에서 느낀 점이다. 어쩌면 ‘그냥 내버려 둬라. 저 인간은 원래 그렇잖아.’하며 시쳇말로 이미 괄호 밖에 내놓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상황이야 어쨌건 간에 그런 생각은 해 본다. 뭐라도 잘난 구석이 있어야 사람들이 나를 시기하거나 질투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야말로 나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다. 그것도 아니다. 나는 오히려 평균치에 비해 타인들보다 못하면 못했지, 나은 면은 거의 없다. 괜찮다. 잘 난 것이 없는 나 자신의 모습을 인정한다고 해서 자존심에 조금도 흠집이 나지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웃사이더 어쩌고 저쩌고 하는 노래를 들었기 때문일까? 머릿속에도 없던 오늘의 글감이 툭 튀어나왔다. 이런 게 하늘에서 글감이 떨어지는 경우가 아닐까 싶었다. 글감은 마음에 들었다. 어쨌거나 내가 아웃사이더라는 건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니까.


젊었을 때에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은연중에 무시 아닌 무시를 당한 적도 적지 않았다. 사실이 그랬다고 해도 큰 불만은 없었다. 대략 삼십여 년 전이니 그때의 분위기로 보면 그게 더 자연스럽던 때였다. 으레 있을 법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적어도 사십 대를 넘어선 이후로 지금까지 주변의 어느 누구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인격적인 대우를 했다기보다는 그냥 회피했다는 말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아마도 괜스레 얽혀 들게 되면 피곤해질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 성격이 결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원리원칙주의자에 한 번 아닌 건 영원히 아닌 성향을 갖고 있으니 사람들이 내게 호감을 가질 리도 없다. 한마디로 사회생활을 함께 하기엔 꽤 피곤하 스타일이다. 젊었을 때에는 그나마 나의 이런 모습에 대해 따뜻하게 조언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지만, 직장에서도 고경력자가 되어버린 지금은 그 어느 누구도 내게 뭐라고 하지 않는다.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 것이다. 따지고 보면 대선배이니 그럴 만도 할 테다. 그래서 내 주변에는 사람들이 고이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정이 많기로 소문이 나 있는 나인데도 말이다.


언젠가 32년 지기에게 왜 내 근처에는 사람이 없는지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친구 녀석은 내가 인생을 너무 피곤하게 산다고 했다. 일을 대할 때나 어떤 일이 생겼을 때 한 번 아닌 것은 죽어도 아닌 모습을 보이는 탓이라고 했다. 그 친구 말에 의하면 가끔은 물러서는 모습도 보여야 하는데, 나는 너무 전진만 한다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서 융통성이 없다는 뜻이겠다. 모난 돌이 정을 제일 먼저 맞는 법이라고 하는데, 언제든 어디에서든 항상 나는 그 모난 돌이었다는 얘기였다. 딱 전형적인 '트러블 메이커'가 아니었을까?


팔구 년 전쯤 한 직장 상사의 횡포에 대해 분개했던 적이 있었다. 직장인이라면 웬만해서는 내부 고발 같은 건 꿈꾸기 어려운 현실이라는 데에 공감할 것이다. 어지간한 관리자의 전횡이 있더라도 눈을 감아 버리는 풍조도 잘 알 것이다. 그때 마치 무슨 독립투사라도 되는 양 그에 맞서 싸웠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60여 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공개 사과를 요구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상부 기관에 고발하겠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괜히 나섰나 싶은 생각이 들곤 한다. 기어이 공개 사과를 받아내던 순간에 후련할 줄 알았더니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내가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살지,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자기 털끝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외면해도 무방할 텐데 말이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내 모습을 고치려고 시도해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기 위해서, 지금까지 아니던 것을 마치 그 정도는 괜찮다는 듯 한 발 뒤로 물러서는 건 내 양심이 허용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사람들이 날 괴롭히는 일은 그다지 없을 것 같다. 이렇게 홀로 지내고 있는 게 좋냐고 가끔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나도 사람이긴 사람인 모양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직장에서 생활할 때 외롭다는 생각이 들 때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해도 앞서 말했듯 내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아닌 것을 맞다고 하거나, 불합리한 것을 보고 눈감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어떤 알량한 정의감이나 객기 때문은 분명히 아닌 것 같다. 그냥 그건 내게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한 번 아닌 것은 어떤 경우에도 아니어야 한다. 아마도 그건 앞으로 내가 떠안고 가야 할 영원한 숙제가 아니겠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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