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창가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이만하면 옛날 선비의 삶도 부러울 데가 없다. 가히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대장부의 삶이 어쩌니 저쩌니 할 만하지 않은가? 장원급제 따위의 목표 같은 건 내게 없다. 추운 겨울밤 불멍이라도 때리듯 그저 한 편의 글을 쓰기만 하면 될 뿐이다. 때로는 아무런 욕심 없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큰 복인가 싶을 때가 있다. 누구는 생업에 쫓겨서, 또 다른 누군가는 시간이 없어서 꿈도 못 꿀 일을 내가 하고 있으니 있으니 어찌 행복한 삶이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꼭꼭 닫힌 창문 너머로도 한기가 느껴질 만큼 날이 많이 차가워졌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행인들의 옷차림에서 급격한 기온 변화를 체감하는 중이다. 조금은 텁텁한 느낌이 든다. 아침에 입고 나온 꽤 두께가 있는 카디건이 내내 몸에 쓸리고 있다. 아무래도 이번엔 가을을 구경하기 글렀다며 이미 마음은 체념을 해 버렸다. 을씨년스럽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춥다고 표현해야 할까? 마치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여기저기에서 춥다는 말이 들려온다. 잠시 머리를 식힐 겸 밖으로 나서도 이내 나는 옷깃을 바짝 세우고 지퍼를 있는 대로 잠가야 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단조로운 풍경을 바라보며 글을 쓰다가 문득 사레라도 들린 듯 밭은기침을 하고 만다. 흡사 음식이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치받던 말이 생각났다.
"사람이 여가 시간에 좀 창의적인 걸 하지,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는 글을 쓴다면서 왜 그러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
처음 듣는 말이 아니었으니 그다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어쩌면 처음 듣는 말이 아니라서 들을 때마다 가슴에 깊은 생채기를 남기는지도 모른다. 좋게 해석하면 그럴 시간에 잠이나 자든지, 아니면 바람이라도 쐬고 오든지, 그도 아니면 운동이라도 하는 게 더 나을 거라며 내 편을 들어준 말이라고 할 수도 있긴 하다.
물론 이 말에 나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아내에게 그때마다 일일이 그건 아니다,라고 해명하고 싶은 마음까진 들진 않는다. 하나의 현상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나 평가는 갈리기 마련이듯 나와 내 아내의 성격 또한 서로 다르고 생각도 같지 않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쓰기를, 그저 내 아내라는 이유로 그녀가 무조건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건 아니라는 것 또한 나 역시 알고 있기 때문이겠다.
일단 논리적으로는 그렇기는 하나,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솔직히 섭섭한 마음이 앞서곤 한다. 저런 생각을 갖고 자주 저리 무례하게 말하는 사람이 내 아내라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서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도 아닌 바로 가족일 수 있다는 어떤 책의 대목이 쉽게 이해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원래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하는지에 대해선 일절 관심이 없다. 그러나, 가족이 보이는 반응과 태도 등에 대해선 관심을 끄려고 해도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나를 싫어한다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타인은 나를 보자마자 자취를 감춰 버리면 그만이지만, 내 일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은 그런 상황에서도 내 시야에서 머물기 때문일 테다.
어떤 일이 과연 창의적인 일이라는 걸까? 혼자만 즐겁고 행복한 그런 일에 빠질 게 아니라 가족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일에 매달리라는 말일까? 아니면 단적으로 얘기해서 이 버거운 살림살이에 실낱 같은 생명줄이라도 되는, 뭔가 돈이 되는 그런 일을 얘기하려는 것일까?
적어도 지금 내 깜냥으로 보자면 글쓰기는 결단코 돈이 되는 일이 아니다. 그것까지는 쉽게 이해가 가는데, 과연 글쓰기라는 것이 나 혼자만 즐겁고 행복한 게 아니라 가족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작가가 아니면서 작가가 되고 싶은 삶은, 작가도 아니면서 속 편하게 글이나 쓰고 있는 삶은 고단할 뿐이다. 과연 언제쯤이면 나는 이 고단함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