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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 싸움

140일 차

by 다작이

어디선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너무도 또렷이 들리는 아우성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내 귀에 확성기를 들이밀고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눈을 뜨고 소리의 진원지부터 찾아냈다. 역시 이번에도 단잠을 깨운 건 무례한 휴대전화의 알람 음악이었다. 뜬금없이 이 시각에 왜 울리나 싶었다. 매일 5시 반에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분명 나는 손을 댄 기억이 없다. 더군다나 아침 9시라니. 가만히 생각해 보니 첫 알람이 울던 5시 반에, 주말이라며 이 시각에 맞춰놓은 기억이 났다.


이래서 무의식적인 행동이 무서울 수밖에 없다. 그 경황없던 순간에, 그것도 잠도 미처 못 깬 상태에서 어떻게 1분의 오차도 없이 정각 9시에 알람 시각을 맞췄을까? 그래도 오늘 아침은 나름 선방했다. 늦잠인 건 맞지만, 9시라면 아직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 더 잘 이유는 없었다. 이미 정신도 차렸다. 바로 일어나 바쁘게 움직이면 10시 반 전에 집을 나설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매번 주말마다 더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설수록 더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는 걸 깨닫곤 했다.


곧장 일어나려다 내친김에 노래를 끝까지 들어보고 싶었다. 아침마다 끄는 버릇이 있어서 제대로 들은 적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처음으로 정신이 말짱한 상태에서 들었다. 그 경쾌한 리듬과 빠른 비트에서 오는 흥에 나도 모르게 취할 만했다. 흥얼흥얼 따라 부를 수는 있어도 노랫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좀처럼 알 길이 없다. 그 빠른 팝송의 노랫말이 내 귀에 들릴 리 없다. 기분 같아선 당장 일어나 춤이라도 추고 싶지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몸치인 탓에 마음만 앞서간다.


꽤 유명한 노래다. 적어도 내 또래라면 이 노래를 모르기는 쉽지 않다. 만약 그렇다 해도 목소리만 들어도 누가 부르는지 단번에 알 만한 노래였다. ABBA의 'Voulez-vous'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좋아하는 노래 중의 하나다. 우리말로 해석하면 '당신은 원하나요?'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렇게 요란하고 신나는 음악을 설정해 둔 이유는 뻔하다. 원체 잠이 많은 탓에 이 정도 데시벨이 아니면 일어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 놓아도 종종 그 소리를 듣고도 못 일어날 때가 적지 않다. 아침마다 '일어나야 한다'와 '더 자고 싶다'라는 두 입장이 대립할 때 지지 않으려면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아바의 노래가 클라이맥스로 갈 때쯤 눈을 떴다. 아마도 어쩌면 그전에, 거실에 누워 있던 아내가 방문을 열어젖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어난 후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알람을 해제하는 일이다. 다른 가족이 이 소중한 아침에 일이십 분이라도 더 잘 수 있게 하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고는 시계를 슬쩍 본다. 평소 같으면 아직 이십 분의 여유가 있다는 사실이 먼저 생각난다. 바로 그때 제법 그럴싸한 핑계를 대면서 다시 드러눕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십 분만 더 자도 된다는 유혹의 속삭임이 들려와도 이겨내야 한다.


맞다. 잠시 누울 때의 명분은 그럴듯하다. 다시 자겠다는 게 아니라 편하게 누워 있다가 정신이 들면 그때 일어나겠다는 것이다. 물론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다 다시 잠이 든 게 어디 한두 번인가? 어쩌면 매번 그랬기에 아침마다 시간과의 전쟁을 치렀던 게 아닐까? 항상 그 전쟁엔 두 개의 입장이 대립했다.


어떤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이 뭔가를 결정하려고 할 때면 천사와 악마가 나타나 서로의 주장을 막 펼치는 장면을 볼 때가 있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눈에 보이지 않는 두 녀석들이 내 양 옆에서 끊임없이 재잘대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뒹굴거리다 보면 검은 녀석의 말에 휘둘리곤 한다. 그때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영락없이 지각하게 된다.


매번 그랬듯 오늘도 싸움에서 흰 녀석이 기어이 이겼다. 부리나케 일어나 몇 가지 할 일을 한 뒤에 씻고 나갈 준비를 마쳤다. 서두른 덕분에 꽤 여유 있게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거울을 보며 혼자 씩 웃어 본다. 고작 조금 더 일찍 일어나 움직였을 뿐인데 마치 오늘을 시작하기도 전에 성공적인 하루를 보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렇게 바로 일어나면 해결될 이 간단한 싸움에서, 나는 왜 매일 혈전을 치러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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