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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의 그 소녀

by 다작이

내가 한창 라디오를 들었을 때는 아마도 중학교 1학년부터 스물다섯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당시에 많은 애청자들을 확보했던 프로그램들이 있었는데, 이문세 씨의 '별이 빛나는 밤에'나 김기덕 씨의 '2시의 데이트', 그리고 고 김광한 씨의 '김광한의 팝스 투나잇'이 가장 기억에 남아 있다. 참 많이도 들었다. 만약 카세트테이프였다면 자기테이프가 늘어질 대로 늘어지지 않았나 싶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뭐랄까, 라디오는 당시의 우리에게 만능 보물상자와도 같았다. TV처럼 얼굴이나 장면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단지 목소리만 들릴 뿐인데도, 나는 라디오의 매력에서 놓여나지 못했다. 늘 시간만 되면 라디오 앞에 쪼르르 달려가곤 했다.


그러던 중 내 얼굴을 화끈 달아오르게 만든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사실 사건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내가 벌이지 않은 일에 대해 얼마간 곤란한 지경을 겪게 되었으니 그렇게 표현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사실 그때 나는 체대 태권도학과를 진학하려고 도장에서 열심히 수련하던 중이었다, 때마침 여고생 한 명이 도장에 왔는데, 나와 동갑이었던 그 아이는 기계체조 국가대표상비군 선수였다. 어찌나 귀엽던지 나는 솔직히 그 아이를 주머니에 넣어 다니고 싶었다. 얼마 후 그 아이에 대한 얘기를 내 친구에게 했었는데, 그 녀석이 나 몰래 일을 치고 만 것이다.


어느 날인가 아무 생각 없이 한 라디오 방송을 듣고 있을 때였다. 그때의 그 프로그램이 누가 진행하는지 혹은 어떤 이름의 것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별이 빛나는 밤에'와 동시간대에 방송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내 기억으로는 당시 그 프로그램이 '별이 빛나는 밤에'보다 약간 더 재미있었다. 물론 시청자들의 사연을 받고 신청곡을 들려주는 시스템은 똑같았다. 게다가 그 방송사에서 제공하는 선물은 귀가 솔깃한 것이었다. 60분짜리 공 카세트테이프 40개를 보내줬다. 나 역시 그 선물이 탐났지만, 딱히 보낼 사연도 없고 해서 그냥 방송만 즐겨 듣고 있었다. 바로 문제의 그날, 라디오 방송 진행자의 목소리를 통해 들려온 이야기에 나는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대구에 살고 있는 17살의 고등학교 1학년 학생입니다. 저는 바쁜 공부 중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어 태권도 도장에 나가고 있습니다. 2년 뒤에 체대 태권도학과에 진학할 예정이거든요. 그런데 얼마 전에 기계체조 국가대표상비군 선수인 여학생이 저희 도장에 왔습니다. 그런데 ***님(라디오 진행자 이름), 제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아이를 본 이후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겁니다. 밥을 먹을 때에도, 공부를 할 때에도 그 아이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좋아하는 이 마음을 전해야겠는데 도무지 그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님! 어떻게 하면 그 아이에게 제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그 이이를 좋아한다는 것만 빼면 영락없이 내 얘기였다. 주머니에 넣어 다니고 싶을 정도라면 좋아하는 것 아닌가 싶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도 크기의 마음은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설마 하며 듣다가 나는 그 사연의 주인공이 나란 걸 알아차렸다. 마지막에 사연을 보낸 사람의 이름이 내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친절하게도 라디오 진행자는 그 아이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몇 가지의 방법까지 알려 주었다.


사연이 라디오에서 나오고 난 뒤 나와 친구 사이에 있었던 일은 생략하겠다. 나 그냥 그것 하나만 생각했다. 그 아이가 그 방송을 듣지 않았기를 바랐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다음 날에 일어났다. 도장에 가자마자 누군가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박**! 나 좀 봐."

이름을 부른 사람은 바로 그 체조 소녀였다. 그런데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도장에 다니고 있지 않으니, 다들 누구를 부르냐며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 체조 소녀가 부른 이름은 바로 내 친구, 즉 라디오에 사연을 보냈던 녀석의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도장 구석에 불려 간 나는 그 소녀의 기에 눌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라디오 사연 잘 들었어. 너, 글 잘 쓰던데?"

"아, 그거 내가 쓴 거 아니야. 내 친구가 써서 보낸 거야."

"그러면 네 친구한테도 내 얘기를 했단 말이지."

"아, 뭐, 그냥."

"뭐라고 했는데?"

"그냥 우리 도장에 체조 선수 한 명 다닌다고 했어."

"어제 그 앵커는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하던데?"

하마터면 친구 녀석과 의절할 뻔한 문제의 대목이 나왔다. 체구도 아담한 데다 너무 인형처럼 생긴 아이라 주머니에 넣어 다니고 싶은 정도라고 했던 그 이야기를, 친구 녀석이 부풀려 놓고 말았던 것이다. 내가 그 아이를 좋아한다고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인형 같다느니 주머니에 넣는다느니 하는 내용은 생략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아이에게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래서 나한테 그렇게 친절하게 태권도를 가르쳐 준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난 그것도 모르고 너 참 좋은 애라고 알았는데, 속이 정말 시커멓잖아?"

"저, 그게……."

"설마 어제 앵커가 가르쳐 준 대로 나한테 시도하는 건 아니겠지? 뭐, 됐어. 아무튼 넌 내 스타일 아냐. 앞으로 나한테 말 걸지 마."


본의 아니게 끼를 부린 꼴이 되어 그 아이에게 단단히 찍힌 나는 두고두고 눈총을 받아야 했다. 말은커녕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나는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서 사람 입장만 난감하게 하냐며 친구에게 따졌다. 궁지에 몰렸던 그 친구는 사연을 보내고 난 후 받은 사은품의 절반인 공 카세트테이프 20개를 내게 주며 이걸로 퉁치자고 했다.


한참 후 그 아이가 내게 마지막으로 말을 건넸다.

"야! 나 팔아서 받은 공 테이프 잘 쓰고 있냐?"

그러고는 얼마 후 그 아이는 체조 훈련을 받으러 다시 학교로 떠났다. 당연히 그 후로는 단 한 번도 보질 못했다. 무려 37년 전의 일이었다. 그 체조 소녀는 지금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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