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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산 가는 길

by 다작이

오늘은 라라크루 13기에서 서울 청계산 투어를 가는 날이다. 출발도 하기 전에 마음 좋은 이들의 얼굴이 하나둘 떠오른다. 더군다나 일면식도 없던 이들이 공통 관심사를 가졌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결성된 모임이 아니던가? 적은 나이가 아닌데도 오늘의 만남이 기어이 밤을 지새우게 만들었다. 원래 잠이 꽤 많은 편이라 자칫하면 6시 31분 열차를 못 탈 것 같아 잘까 말까 고민하긴 했다. 그래도 영 안 자는 건 아닌 것 같아 조금은 일찍 자리에 누웠는데 거짓말처럼 눈이 번쩍 뜨였다. 설마 마지노선인 5시 반을 넘긴 건 아닌가 싶어서 휴대전화부터 확인했다.


새벽 2시 30분이었다. 얼추 계산해 보니 1시간 반 가량 잔 듯했다. 다시 누워 잠을 청하면 열차표를 날릴 가능성이 높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으니 어떻게든 버티다 시간 맞춰 나가야 했다. 마음은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싶었지만, 아무리 좋아해도 쏟아지는 잠을 물리치는 데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노트북에 저장된 백여 편이 넘는 영화 중에서 한 편을 골랐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상'이라는 영화였다. 출연 배우들이 죄다 낯선 얼굴들이었다. 비극인지 희극인지 애매한 분위기도 영화를 보는 내내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리 잘 만든 영화는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일본 영화가 그렇듯 내게는 꽤 깊은 울림을 주는 영화였다.


영화가 끝나고 나니 4시 45분이었다. 20분 후에 슬슬 나설 생각이었다. 얼른 씻고 가방을 챙겼다. 가방이 제법 무겁다. 별 건 아니지만 오늘 만나는 사람들에게 줄 작은 선물인 책을 챙기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노트북도 넣었다. 참 선량한 사람들, 마음이 넉넉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건 언제나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사는 내내 변하지 않는 일들 중의 하나가 기다리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 반드시 오고 만다는 것이다. 이제나 저제나 하며 손꼽아 헤아린 일이었다, 어느새 당일 아침을 맞이했다. 아무리 KTX가 있어서 오고 가는 데 큰 불편함은 없다고 해도 대구에서 서울까지 다녀오는 건 역시 만만한 거리는 아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다. 나는 고래는 아니지만, 좋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생각 하나로 식전 댓바람부터 기꺼이 동대구역으로 달려간다. 왕복 기차비가 대수랴? 아마도 그들과의 만남을 값어치로 환산한다는 게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 아닐까 싶다. 비록 몇 살 되지는 않았다고 해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내 편이 필요한 법이다. 서로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언제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관계는 아니나 같은 일을 좋아하는 데다, 그로 인해 쉽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큰 복이 아닐 수 없다.


초행길이나 다름없는 서울의 지리를 몰라도 더는 헤매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 어느 누구에게든 물어볼 필요도 없다.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라 그럴 일도 없을 테지만, 서울에 종종 들를 때마다 더 편해진 세상을 실감하곤 한다. 얼마나 편해진 세상인지 모르겠다. 다음 길 찾기만 있으면 어디든 가지 못할 곳이 없다. 나침반도, 지도도 없으면서 휴대전화의 액정만 들여다보며 원하는 목적지로 갈 수 있다니, 불과 삼사십 년 전만 해도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최근에 두어 번 갔을 때에도 휴대전화만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처음 가 보는 청계산, 이번에도 헤매지 않고 잘 찾아갈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충전기 코드와 여벌 배터리만 빠뜨리지 않았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니 서울에 가는 일이 실감 났다. 부쩍 쌀쌀해진 날씨라도 이른 아침이 주는 신선한 공기가 마음을 들뜨게 했다. 지하철이 생긴 이후 처음으로 닫힌 출입문 셔터 앞에서 기다리는 느낌도 충분히 나쁘지 않았다. 단 하나의 흠이라면 잠을 제대로 못 잔 것이지만, 까짓것 오늘 하루쯤은 어떻게 해서라도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보람 있는 여행이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의 만남이 정체된 내 글쓰기를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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