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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일 아침

by 다작이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린 일이 시작되는 순간은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기 마련이다. 아니 어쩌면 바로 그 직전이 더할 수도 있다. 머릿속에선 그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갈 테고,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이번엔 기필코 놓치지 않겠다는 결의가 불타오른다. 그게 바로 사람의 일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만약 이 대업을 앞둔 당사자가 나였다면 그 순간을 즐길 수도 있을 테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입장이라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쉽게 얘기해서 본의 아니게 눈치를 보게 된다는 뜻이다.


어제 퇴근하면서 내심은 크게 걱정했다. 집에 도착하면 어떤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을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싸늘한 공기가 온 집안에 가라앉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온갖 냉랭함만으로 가득 찼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말로 설명하기가 참 묘했다. 싸늘함 가운데 온기가 흘렀고, 언뜻 보이는 유쾌한 분위기 속에 모종의 무거움이 느껴졌다. 아마 단적으로 표현하면 이게 맞을 것 같다. 말 한마디 잘못 꺼내면 한 대 얻어맞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고나 할까?


온 가족이 초비상 사태에 돌입했다. 오늘이 수능 시험일이니 극도의 긴장감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지 않겠나 싶다. 이미 아들은 스물세 살이고 딸도 어느덧 스무 살이다. 정상적으로 상황이 전개되었다면 둘 다 수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나이다. 그러나 작년 수능에서 딸은 성공적인 결과를 얻지 못했다. 물론 딸의 시험 결과를 두고 단지 실패라는 말로 규정지으려는 건 아니다. 누구보다도 자기의 꿈이 명확한 딸이니 그 첫 발을 내딛지 못했다는 의미다.


안 그래도 요즘은 젊은 사람들 중에 자기의 꿈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고학년 아이들에게 장래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어봐도 태반이 없다고 대답한다. 심지어 적지 않은 아이들은 엄마에게 물어봐야 알 수 있다는 말도 서슴지 않고 할 정도다. 앞으로 무엇을 하면서 먹고살아야 할지 모르는 세대들, 평생을 살아가면서 해 보고 싶거나 이루고 싶은 게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세대들이 바로 지금의 아이들이다.


그런 가운데 자기의 꿈이 명확하다는 건 그만큼 큰 장점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성적이 되는 대로 아무 데나 맞춰서 대학 진학을 하고, 대충 4년 동안 공부를 하다가 적당한 자리가 있으면 취직이나 하겠다는 것만큼 막연하고 무개념적인 일도 없으리라. 작년 12월, 재수를 하겠다던 딸의 결심을 뜯어말리지 못한 이유였다. 확실한 자기 꿈과 미래에 대한 자기 나름의 비전을 갖고 불확실한 시간 속에 뛰어드는 딸에게, 명색이 부모로서 응원은 못할망정 재를 뿌릴 수는 없었다. 아니 당연히 응원도 우리의 몫이었다.


솔직히 고등학생 신분이면 루틴을 유지하기가 비교적 쉬웠을 테다. 늘 해 오던 대로 정해진 시간에 등교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완벽한 자유인인 재수생이 되니 그 쉬운 게 흐트러지고 만다. 모두가 출근하거나 등교하고 없는 집에 딸이 혼자 남아 있으니 더 잔다고 한들 뭐라고 할 사람도 없다. 외로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혼자서 이겨내야 한 시간이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제를 맞이한 딸이 그만큼 대견하고 장했다.


지금 벌써 국어와 수학 과목에 대한 평가가 끝나고 아마 점심을 먹고 있을 것이다. 의외로 약한 국어와 이과의 특성상 더 고난도의 수학이 끝났으니 최소한 6부 능선은 넘은 셈이다. 그런 뒤에 먹는 밥, 35년 전 나 역시 그랬듯 그 자리에서의 밥이 맛있을 리는 없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는 게 가장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아무튼 오늘 하루의 중압감을 이겨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딸에게 수고 많았다는 말을 꼭 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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