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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이 떠난 사람

by 다작이

누군가와 헤어진다는 것은 늘 마음에 깊은 생채기를 남기는 법이다. 그저 데면데면한 사이라면 몰라도 얼마나 친밀도가 높은 사람과 이별했느냐에 따라 그 정도는 충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마음의 한켠을 떼어내 주고도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두말할 나위가 없을 테다. 헤어짐 그 자체가 슬픈 일인 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새로운 만남을 전제한다는 것에서나, 혹은 조금 더 나은 내 모습으로의 정신적 성장을 꾀한다는 점에선 이별이라는 것도 가히 나쁜 일은 아니지 않을까 위로해 볼 뿐이다.


흔히 이성과의 관계에서 이별한다는 것은 꽤 극복하기 힘든 시련을 가져다준다. 물론 교제한 기간이 얼마냐에 따라 그 시련의 깊이는 차원을 달리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깔끔하게 헤어지지 못한 경우라고 한다면, 이후에 새로운 인연을 맺는 데에 악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생각의 굴레에서 빠져나오기도 힘들 수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나 역시 두세 번 정도 그런 만남과 이별을 겪어야 했고, 그때마다 마치 홍역을 앓는 아이처럼 한참 동안 아파해야 했었다.


한때 유행했던 어느 노랫말에 '떠날 때는 말없이 떠나가세요'라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의 이별은, 그것도 특히 남녀관계, 그중에서도 어느 정도의 애정을 기반으로 한 관계라면 말없이 떠나는 무례를 저질러선 안 된다. 이왕 남이 아닌 남이 되었다고 해도, 최대한 격식과 예의를 갖춰 상대방에게 이별을 통보해야 한다. 상대방에게서 관계의 청산 즉 이별에 대한 일종의 암묵적인 혹은 원만한 동의를 얻어내는 절차를 거쳐야 그 묵은 관계를 정리할 수 있게 되는 것이겠다.


내겐 이십 수년 전에 헤어진 한 사람이 있다. 이후 새로운 사람을 만났고, 몇 차례의 만남과 이별을 거친 후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여 24년을 살았다. 무려 두 아이까지 있고, 어느새 그 아이들 모두 성년을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깊은 생채기가 남아 있다. 살면서 말끔히 지워질 거라고 생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건 사람마다 다른 영역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난 여전히 그 여인을 마음속에서 밀어내지 못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누군가가 욕해도 할 수 없다. 어쩌면 그건 내 무의식이 조장하는 일이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입장에선 그 여인과 완전한 이별을 하지 못했다. 온다 간다 말 한마디 없이 그 여인은 내 앞에서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시쳇말로 그녀는 잠수 이별이라는 가장 혹독한 시련을 내게 안겨준 여인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을 때, 어느 누구보다도 그녀의 말과 위로가 필요했던 결정적인 순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그 뒤로 무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여인을 볼 수 없었다. 물론 이별 후 1년 반 정도는 중간중간에 그 여인을 보긴 했다. 다만 항상 그녀만 보고 있었던 나와는 달리, 그녀는 내 쪽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러다 서로의 직장과 생활 근거지가 갈리게 되어 자연적으로 더 멀어지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딱 10년 뒤에 길에서 마주쳤었다.


난 당시에 그녀에게서 그 어떤 말도 듣지 못했다. 왜 내가 싫어졌는지, 어떤 점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등에 대해 단 한마디의 말도 없었다. 그때 난 내 나름대로 몸부림을 쳤었다. 정상적으로 이별을 통보한다고 해서 그걸 쉽게 받아들이지는 못한다고 해도, 해명이라도 해줬다면 온갖 억측과 추측으로 수많은 밤을 헤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무슨 운명의 기이한 장난인 건지, 앞에서 말한 것을 포함해서 이십 수년 동안 난 그녀를 딱 두 번 만났다. 아니, 마주쳤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겠다. 첫 번째 마주침은 그나마 길거리에 선 채 3분가량 안부라도 나눴다. 더는 예전과 같은 마음이 아닌 상태의 나였지만, 당연히 그녀에겐 그런 마음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게 당연했다. 두 번째는 뒷모습을 본 것이라 인사는커녕 눈빛조차 마주칠 수 없었다. 그때에도 달려가 왜 내게서 떠나갔는지를 묻고 싶었다. 물론 그렇게 묻는다고 해서 속 시원하게 말할 리야 없겠지만, 적어도 내 마음은 그랬다.


거의 10년 넘어 한 번꼴로 봤으니 앞으로 족히 10년은 더 기다려야 그녀를 또 그렇게 볼지도 모르겠다. 지금 마음 같아선 그땐 꼭 물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다. 무모하고 돌발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두 번 다시 마주치지 않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말은 이렇게 해도 막상 그녀를 다시 본다면 결코 물을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다. 결국 그 의문은 무덤까지 가져가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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