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사정 작업을 하느라 퇴근이 늦었다. 누군가가 옆에 있으면 중요한 일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진다. 퇴근 시각이 다 되어갈 무렵 일을 시작했다. 약하게 음악을 틀어놓고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한다. 으레 이럴 때면 늦게 퇴근하는 걸 익히 아는지라 문 잠그는 아저씨도 왜 아직 안 갔냐고 묻지 않는다. 이미 4년을 서로 봐 온 사람이다. 굳이 별도의 말을 건네지 않아도 몇 시쯤 학교를 나서는지 알고 있다. 내가 있는 걸 확인한 아저씨는 고맙게도 건물 전체의 전원을 내리지 않는다. 일할 수 있을 만큼 하다가 퇴근해도 좋다는 배려였다.
사실 난 과학 전담 교사라 마음만 먹으면 하루 반만 들이면 작업을 완료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 그건 마뜩지 않다. 한 가지 복병이 있다. 9시까지 일하면 나머지는 다음 날 이른 저녁에 일을 마칠 수 있다는 걸 모를 리 없다. 다만 그 시각이 되면 학교에서 버스정류장까지 500 미터 남짓 되는 그 짧은 길이 온통 암흑으로 뒤덮인다. 인적도 거의 없는 곳이다. 오른쪽의 300 미터쯤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아파트 단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과 빠른 속력으로 지나가는 자동차의 조명이 없다면 이 일대는 깊은 적막 속에 가라앉는다.
대략 두 시간쯤 몰입했다. 아무리 전담 과목이라고 해도 성적 사정은 허투루 할 수 없는 일이다. 잠시 엇길로 새면 언제든 민원이 쇄도할 만한 일이다. 특히 요즘 같으면 그 어떤 민원이든 학교가 같이 대응해 주는 법은 없다. 크건 작건 간에 당사자가 일대일로 맞서야 할 일이다. 영문을 모르는 친구가 민원에 민감한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알을 한 적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민원이 두려운 게 아니라 곧 망망대해에 널빤지 하나 없이 떠다니는 신세가 된다는 게 무서운 거다. 일반적인 바다에서의 표류라면 누군가가 구조하러 올 거라는 희망이라도 있지만, 학교에서의 민원은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한 작업을 몇 번이고 훑어봤다. 별 이상이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창밖을 바라보니 어느새 짙은 어둠이 담벼락 밑까지 와 있었다. 더 늦기 전에 나가야 했다. 시계를 확인했다. 6시 8분, 저녁이라고 하기에도 뭣 하고 밤이라는 말과는 더더욱 거리가 먼 시각이었다. 한두 시간 더 일하면 목표치를 달성하고도 남지만, 비교적 이른 시간에 나서는 건 잡생각이 주는 존재의 위협감 때문이다. 이렇게 살고 있는 게 맞는지, 무엇 때문에 지금처럼 살고 있는지, 한창 고민하고 있는 문젯거리는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 건지 등등. 온갖 잡생각들이 천 갈래 만 갈래로 뻗어나간다. 심지어 글을 이렇게 계속 써도 되는지, 또 미뤄둔 글더미는 언제 편집할 건지에 대한 걱정도 앞선다. 그야말로 잡념에 깔리기 직전이다.
어둠은 환한 곳으로 나와야 모습을 감추는 법이다. 적어도 왜관역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타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게 된다. 한참 전부터 이제나 저제나 하며 버스만 기다리고 있다. 손을 쥐었다 폈다를 하릴없이 반복한다. 그렇게 살을 에는 듯한 날씨가 아닌데도 이 글을 치느라 바쁜 오른손 손등이 떨어져 나갈 것 같다. 게다가 내내 휴대전화를 들고 있는 왼손은 이미 감각마저 상실한 느낌이다. 이 시각이면 저 아래 삼거리에서 좌회전 후 올라왔어야 할 버스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하필이면 내가 선 이곳은 버스정보시스템 모니터도 없는 곳이다. 버스의 앞꽁무니를 보기 전엔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이유다.
드디어 언덕 아래에서 버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서 있는 곳을 지나 언덕 위까지 올라간 뒤에 버스가 유턴하는 데 5분의 시간이 걸린다. 숨통을 옥죄던 그 많은 생각에서 벗어나기까지 5분 남았다. 온갖 생각에 짓눌리며 이 글을 쓰다 보니 어느새 맺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살짝 언 듯한 두 손등은 버스를 타면 해결될 테다.
버스가 빠른 속력으로 날아온다. 20 미터쯤 남겨 둔 상태에서 손을 번쩍 든다. 이 버스를 놓치면 다음 버스가 1시간 20분 뒤에 있으니 크게 손을 들어야 한다. 버스 문이 열리자마자 오른발을 버스 안으로 밀어 넣는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어쨌거나 오늘 하루도 무탈하게 보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