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일 차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하노라.
이 시조는 고려 시대에 지어진 시조들 중에서 가장 문학성이 뛰어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이조년 시인의 다정가다. 종장의 첫 구인 '다정도'에서의 다정을 취해 그렇게 이름이 지어진 것인 모양이다. 무려 700여 년 전의 시조였다. 몇 학년 때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다. 아마도 처음 이 시조를 배우던 그때의 첫 느낌도 심상치 않았던 듯했다. 배웠던 그날 바로 외우게 되었다.
그러고도 무려 35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걸 보면 이 시조가 조금은 각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제목에서처럼 '다정'이라는 낱말이 주는 느낌 때문이 아닐까?
여기저기를 찾아보니 이 '다정가'는 배꽃에 달이 환하게 비치는 어느 밤에 읊은 시조일 것이라고 했다. 밤이면 으레 어두운 게 일반적이겠으나 꽃도 하얗고 그 꽃 위에 떨어지는 달빛도 밝으니 사위가 온통 하얗게 느껴지는 그런 밤인지도 모를 일이다. 왜, 그런 장면을 떠올려 볼 수 있지 않을까? 온통 칠흑같이 어두운 깊은 밤에 하얗게 내린 눈에서 반사되는 흰 빛이 세상을 밝히는 듯한 그런 장면 말이다. 만약 이런 풍광을 보고 있노라면 멀쩡한 사람도 마음이 설렐 수도 있을 듯한 그런 밤이지 않을까? 어쩌면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을 그런 밤이기도 할 것이다.
순간 시인의 마음이 되어 보고 싶다. 문득 시인은 하늘의 은하수를 보고 있다. 그러다 아주 깊은 밤이 되었음을 느낀다. 삼경이라고 하니 분명 밤 23시와 새벽 1시 사이일 터였다. 지금처럼 시계가 있던 시대가 아니었으니 뭔가를 보고 언제쯤인지를 짐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매개체가 은하수인 모양이다. 하늘에 있는 은하수의 위치를 보니 삼경쯤 되었으려니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이런 눈빛으로 사물을 바라본다면 그 마음과 눈빛 속에 어찌 살가운 마음이 담기지 않을까?
그러다 시인의 귀에 익숙한 두견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너무도 구슬프게 들리는 그 울음소리, 그러나 그 두견새가 가지에 서린 봄의 마음을 어찌 알겠느냐고 시인은 단정한다. 솔직히 나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은 없지만, 두견새의 울음소리는 너무도 구슬퍼 예부터 한이나 슬픔을 표상하는 이미지로 각인되어 왔다고 알려져 있다. 아마도 여기에서의 일지춘심은 화자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겠나 싶다. 단순히 봄을 기다리는 마음에서 벗어나 어쩌면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모든 감정을 포함한 마음인지도 모른다. 결국 두견새의 울음소리만큼 시인의 마음도 슬프고 고독하다는 뜻이겠다.
그러나 정작 시인이 생각하는 그 누군가는 시인에 대한 생각은 추호도 없이 편히 잠들어 있을 깊은 밤이다. 그 가운데에 시인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렇게 마당에 나와 배꽃을 본다. 그러다 달빛에도 취해 보고 흘러가는 은하수를 바라본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두견새의 울음소리에 마음까지 심란한 그런 밤이다. 정,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깊어 잠을 못 이루는 밤이니 결국 다정은 병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일까, 시조를 다시 한번 읽어보고 뜻을 되새겨 보니 마음이 우울해진다. 그러나 이 우울이 부정적인 이미지를 그려내지는 않아 그나마 다행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도 깊은 밤에 마음을 뒤집어 놓은 건 그놈의 '다정' 때문일 터였다. 정도 너무 깊으면 충분히 병이 될 수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래도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그 누군가(그 상대가 연인이든, 부모든, 형제든, 친구든, 임금이든, 혹은 나라든)를 그리며 밤잠을 설치는 아련한 마음을 가진 그 시인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분명 인간에 대한 깊은 정이 깔려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니까. 조건 없이 누구에게든 다정할 수 있는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결코 '다정'이 병일 수는 없다. '무정'하게 살아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