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일 차
어제는 지하철을 타고 가다 반월당역에 내렸다. 몇 권의 책을 내다 팔 생각이었다. 여전히 진행 중인 책정리, 목표는 선물로 받은 책과 저자 친필 서명된 책을 제외하고는 죄다 처분하는 것이다. 한때는 무려 이천 권이 넘는 책이었다. 어느 순간 텅텅 비어버린 책꽂이를 보고 있으려니 만감이 교차한다. 이제 대략 백 권쯤 남았을까? 책가방 무겁다고 공부 잘하는 게 아니듯 책이 많다고 해서 글을 더 잘 쓰는 건 아니라는 깨달음이 불시에 찾아든 탓이었다. 필요한 책이 있으면 공공도서관에 가면 된다.
책을 내다 팔 때면 늘 이전 역인 중앙로역에 내려서 이동했다. 공공도서관을 갈 때도 그렇고, 시내에 두 곳이 있는 중고서점에 가려면 반월당역보다는 중앙로역이 더 가깝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글 쓰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반월당역에 허겁지겁 내린 적이 있었다. 약간 더 걸어야 하니 반가울 리 없었다. 게다가 반월당역은 환승역이다. 타고 내릴 때의 그 혼잡함은 마치 서울에 온 듯한 기분이 들 정도다.
그런데 막상 반월당역에 내려 보니 몇 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 여기저기에 의자가 많아 놓여 있어서 글을 쓰다가 마무리를 짓고 싶으면 잠시 앉아서 목적을 이루고 갈 수 있었다. 게다가 메트로 광장(?)을 지나가는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글이라는 게 결국 사람들을 관찰한 결과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이만한 참고 자료를 어디에 가서 구할 수 있을까? 게다가 군데군데 커피 자판기가 있어서 저렴한 비용으로 차도 마실 수 있는 곳이다.
시간을 다투지만 않는다면 반월당역에 내리는 게 여러모로 더 합리적이었다. 그래서 어제도 그곳에서 내렸다. 쭉 뻗은 지하상가를 10분 정도 걸어가서 지상으로 나가면 공공도서관으로 갈 수 있다. 물론 반대로 가면 중고서점이 나온다. 교통카드를 찍고 개찰구를 빠져나와 3분쯤 걷자니 원형의 작은 광장이 나온다. 일명 메트로 광장이다. 대도시권을 일컫는 말이라는 것, 또 대도시의 지하철을 뜻하는 낱말이 메트로라는 건 알겠는데, 왜 그곳에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식당가가 늘어 선 2층으로 이동할 수 있는 에스컬레이터가 놓여 있고, 원형 주변엔 몇 개의 음료자판기가 설치되어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 원형 공간의 여기저기에 1~2인용 철제 의자가 설치되어 있다. 일일이 세어 보진 않았지만 족히 백여 명은 앉을 수 있는 공간이다. 물론 의자에는 어김없이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판기 커피를 손에 들고 있었다. 죄다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뿐이었다.
그때 묘한 장면을 보았다. 원형 구조물 안에 있는 사람들은 누가 보다 늙어버린 사람들이었다. 그 공간은 둥근 기둥을 둘러싸고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조성되어 있는 곳인데, 앉으면 등을 기댈 수 있는 곳이라 가장 먼저 자리가 차는 곳이다. 족히 오육십 여 명은 되어 보였다. 아마 앉은 사람들의 평균 연령을 계산해 봐도 75세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이제 오십 대 중반인 내가 가서 앉기에도 머쓱한 곳이었다.
물론 원형 구조물 바깥쪽은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마치 서로 섞이면 안 되는 물과 기름이라도 된 듯,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각자의 영역을 지키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나이 든 누군가가 젊은 사람에게 넌 늙지 않을 줄 아냐고 했더니 자신은 절대 늙지 않을 거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곳은 이미 늙어 버린 사람들과 절대 늙지 않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묘한 곳이었다. 내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자기는 결코 늙지 않을 거라고 했다. 설령 그런 자신이 나이가 들어 늙는다고 해도 결코 지금의 노인들처럼 살지는 않겠다며 큰소리치던 사람도 있었다.
인생은 별 것이 없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 나물의 그 밥이다. 아직 늙지 않은 그들은 그렇게 호언장담하는지 몰라도 살아보면 결국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었던 누군가의 전철을 그대로 밟게 되더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인생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