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우나 더우나

by 다작이

나른해지는 오후다. 어디선가 뜬금없이 내리쬐는 햇빛이 느껴져 더 늘어지는 것 같다. 마치 봄날의 햇살처럼 언제 춥기라도 했냐는 듯 땅을 데우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 두 팔을 벌린 채 온몸에 받아들이고 싶지만, 잠이 들면 얼어 죽기 딱 좋을 만큼 춥다. 날씨만 이 지경이 아니라면 벤치 같은 데에 앉아 잠시 조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으리라. 물론 이 날씨에 밖에서 그러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아마도 어쩌면 막 점심을 먹고 왜관역 대합실에 앉아 있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왜관역은 대구에서 구미로 가는 2/3 지점에 있는 작은 읍지역이다. 왕래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아도 대구광역시 근교 지역이라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물론 작년 12월 중순경에 대구와 구미를 오고 가는 대경선이 개통된 이후로 부쩍 이동 인구가 많아졌다.


몇 명의 사람들이 승강장에서 대합실을 통과해 밖으로 나간다. 잠시 출입문이 열리면서 한기가 순식간에 들이닥친다.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아직 내가 움직여야 할 차례가 아니었다. 대구로 가는 대경선이 들어오려면 이십오 분은 더 기다려야 했다. 눈을 감으면서도 대합실 출입문을 넘어 실내까지 뻗는 따뜻한 빛이 눈이 부실 정도로 곱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탓인지, 아니면 포만감을 이기지 못한 탓인지 금세 고개를 떨구고 선잠에 취해 버린다. 가끔씩 지나가는 상하행 열차들의 요란한 소리가 이내 자장가처럼 들린다. 얼마 안 있어 이번에도 쌀쌀한 기운이 온몸을 한차례 휘감고 지나간다. 전광판을 확인하니 오 분 뒤에 부산행 무궁화호 열차가 들어온다고 했다. 그 열차를 타야 할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대합실을 통과하면서 찬바람을 몰고 온 것이다. 목덜미를 스치는 서슬 퍼런 칼바람에 목이 움츠러드는가 싶더니 다시 눈이 감긴다.


한적한 오후의 한나절을 보내고 있다. 과연 이보다 더 포근한 순간이 있을까? 속은 태산 같은 걱정에 휩싸여 있어도 겉은 평화롭기만 하다. 혼자서 이 평온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것만 해도 큰 복이 아닌가 싶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한여름을 버틸 때에도 똑같은 느낌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추우나 더우나 오후는 나른한 게 지극히 정상인 모양이다. 이 감당 안 되는 졸음을 몰고 온 게 고작 한 줌의 햇빛 때문인지 옷 속까지 파고드는 추위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너무 더워도 잠이 올 수 있듯 대단한 추위에도 어김없이 눈은 감긴다.


오늘은 원래 학교에 갈 계획이 없었다. 며칠 전에 어떤 일정이 잡혀 있어서 자가 연수원을 제출해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 일이 어제 취소되는 바람에 오늘 하루가 공중에 떠 버리고 말았다. 출근하지 않는 날이라 그런지 아침부터 마음이 해이해졌다. 자칫하면 따뜻한 방에서 하루 온종일 뒹굴거리기 좋은 날이었다. 이건 나에게 보내는 일종의 위험 신호인 셈이었다. 설령 밖에 나가 노는 한이 있더라도 집에 머물러선 안 된다는 경고 메시지나 다름없었다.


이 추위에도, 또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데도 굳이 집을 나선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오며 가며 약간 고통스럽기는 해도 역시 집을 나서야 한다는 내 판단은 옳았다. 그 덕에 오늘은 벌써 세 편째 글을 쓰고 있다. 지금까지 집에 머물렀다면 세 편은커녕 한 편의 글도 쓰기 힘들었을 터였다. 글을 쓰는 놈이 시간이나 장소 핑계를 대고 싶진 않지만, 집에 눌어붙어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글을 못 쓰게 됨을 익히 경험해 왔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늦은 저녁에 구차한 구실을 늘어놓느니 눈을 떴을 때 움직이는 게 모로 보나 현명한 일이었다.


아마도 오늘 저녁은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 뭔가 딱히 두드러진 활동 성과는 없었지만, 하루 온종일 방 안에서 뭉그적대며 시간을 보내지 않은 것만 해도 잘한 일이라며 스스로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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