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에서 200만 부의 판매 부수를 올린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총 판매량의 60%가 국내에서 판매되었다고 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기이한 표현이 사람들에게 상식 아닌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우리나라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사전적인 정의만 들이댄다고 해도 설명할 말이 부족하지 않을 테고, 또 저마다 마음속에 담아둔 것만 해도 차고 넘칠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정의란 것이 무엇이기에 이 땅에선 실현될 수 없는 것인가 하며 사람들은 깊은 번뇌에 빠졌으리라. 그것까지는 좋은데 그런 번뇌의 몸부림이 엉뚱하게도 지름신의 강림이란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오죽했으면 누구든 집에 가지고 있지만, 그 어느 누구도 완독하지 않았을 책이라고 하지 않는가?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우린 그리 현명하지 못한 소비를 한 셈이 된다.
31년 지기가 내게 넌 2찍이냐고 물었다. 무지하고 대책 없는 족속, 이 땅에서 몰아내야 할지도 모르는 토착왜구라는 비아냥까지 듣는 TK(대구경북)라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미안하지만 내게 그 무례한 질문을 던진 그의 기대는 어긋나고 말았다. 이곳에 살고 있지만 난 2찍이가 아니다. 당연히 1찍이도 아니다. 굳이 내 정체를 밝히자면 3찍이나 4찍이쯤 되지 않을까? 물론 나를 2찍이라고 믿는 그는 기세 좋게 말한다. 사람 하나 잘 뽑으니 나라가 얼마나 잘 돌아가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지금처럼 자랑스러운 적은 없다고 말한다. 게다가 정의사회의 구현이 멀지 않았다고 한다.
1찍이도 아니고 2찍이도 아닌 내가 짐짓 2찍이인 척하며 질문을 던진다.
"전임 대통령 부부가 구속된 이례적인 사태는 어떻게 생각하냐?"
"인과응보 아닌가? 죄를 지었으면 벌을 달게 받아야지."
"그래, 그러면 수 개의 재판이 진행되다 멈춘 그 사람은?"
"그분은 죄가 없어?"
"그러면 그 많은 증거는?"
"그거 다 조작된 거야!"
"그만큼 압수수색하고 털어도 봐, 죄가 없잖아? 세상에 그 사람만큼 청렴결백한 사람이 어디 있어?"
이미 이렇게 되면 길게 얘기해 봤자 본전도 못 뽑을 거라는 걸 알지만, 난 괜한 오기가 생긴다.
"그러면 전임 대통령의 계엄 선포는 왜 내란이지?"
"나라를 혼자 집어삼키려고 했는데, 그게 내란이 아니고 뭐야?"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일국의 대통령이 뭐가 답답해서 내란을 저지르겠어?"
"그건 네 생각이고. 그래서 그 자가 무식하다는 거야. 그런 사람이 무슨 대통령이라고."
"내란이라는 증거는 있어?"
"차고도 넘치지. 넌 뉴스도 안 보냐?"
"그러면 그의 지지차들도 그 증거가 조작됐다고 주장할 수 있는 거 아냐?"
"그건 그들이 사회를 보는 눈이 없어서 그래. 그냥 내란이 아니라 정당한 통치권의 행사라고 믿고 싶은 거지."
참으로 묘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그 어떤 증거도 서로 조작된 것이라 한다.
그러던 중에 광복절 특사 건이 생각나서 하나 마나 한 질문을 또 던진다.
"아무리 그래도 입시 비리를 저지른 자를 사면하는 건 국민 정서에 위배되는 거 아냐? 아직 형기의 절반도 채우지 않았는데 말이야."
"그 사람도 죄 없어."
"표창장을 위조해서 자식을 대학에 보냈잖아?"
"네가 말하는 그 표창장, 정작 쓰지도 않았어."
"썼다 안 썼다의 문제가 아니잖아. 그런 시도를 했다는 것 자체가 범죄 아닌가?"
"그래? 넌 대한민국에서 그만한 잘못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다고 생각해? 그러면 나 모씨는, 한 모씨는?"
"그 얘기는 인터넷 댓글에서 많이 보던 건데."
"한 집안을 그렇게 털어대면 과연 이 세상에 죄가 없는 사람이 있겠냐?"
"우리 같은 일반인과 같은 잣대를 들이밀면 안 되지. 적어도 그는 그래선 안 되는 자리에 있었잖아?"
정치 얘기만 꺼내지 않는다면 아무런 탈이 없을 우리지만, 기어이 나는 그 선을 넘고 만다.
"네 말대로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라는 그 사람이 죄가 없다면 정식으로 재판을 받아서 무죄를 밝히면 더 떳떳해질 수 있는 거 아냐?"
"이미 결론을 내놓고 하는 재판에서 어떻게 무죄가 나오냐?"
"네 논리대로 하면 세상의 모든 재판을 어떻게 믿고 받아들일 수 있겠냐?"
"어차피 그분은 국민들의 집단 지성을 믿을 수밖에 없어. 무지한 자들이 그 깊은 뜻을 어찌 알겠냐?"
"졸지에 난 지성이 없는 사람이 됐네."
"야, 됐다. 넌 앞으로 어디 가서 절대 정치 얘기하지 마라. 나이를 그만큼 먹어놓고도 세상을 보는 눈이 그렇게 없어서 어떻게 살래?"
그래서 난 생각했다. 분명한 사실은 있을 테지만, 지금으로선 그걸 증명할 길이 없다고 말이다. 기껏 어떤 얘기가 나오면 서로 상대방에게 잘못됐다고 비난만 하는 세상이다. 각자의 입장에서 생각한 그 차고 넘치는 증거들은 죄다 조작된 것이니 아무리 그럴싸한 걸 들이밀어도 눈을 감아 버린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전 세계에서 가장 팔렸다는 우리나라, 그런데 그 정의는 이미 죽어가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