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엔 주로 라디오를 듣는다.
내가 듣는 주파수는 91.9MHz.
출근시간에는 "굿모닝 fm 테이입니다" 가 방송된다.
지난주 수요일, 맛쟁이 신사 코너에서 늙은 호박을 주제로 레시피를 안내해 주는 방송을 했다.
이런저런 맛 표현을 하던 중, 이원일 셰프가 늙은 호박의 맛에 대해 "싱그럽다"라는 표현을 썼다.
"싱그럽다."
순간 늙은 호박이 싱그럽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맛을 떠나서 "늙은"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에 "싱그럽다"라는 단어가 조합되는 것이 어색했달까.
늙은 호박을 즐겨먹지 않았기에 그 싱그러운 맛이 어떤 것인지 상상되진 않았지만, 맛보다는 이름에서 오는 부조화스러운 느낌에 생각의 번짐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싱그러운 맛을 가진 늙은 호박은 왜 하필이면 "늙은"이란 형용사가 붙은 것일까.
[늙은 호박: 아주 많이 익어서 겉은 단단하고 씨가 많이 여문 호박]
단순히 많이 익어서 늙은 거라고 하면 성숙 호박이라고 해도 됐을 텐데. 왜? 음식에는 성숙이란 단어가 붙으면 안 되는 법도 없으니까. 게다가 싱그러운 맛을 내는 호박이라니 늙었다는 이름이 억울하게 느껴지기도 하기에.
늙은 호박이란 이름 하나로 묵직하고 전통적인 맛만을 상상했었다.
싱그럽다의 '싱'자 조차도 떠올리지 못했던 조합.
늙은 호박의 싱그러운 맛을 상상하며 생각의 번짐을 따라가 보았다.
우리는 때때로, 단순히 어떤 것의 이름만으로도 그것의 속성과 본질을 넘겨짚는다.
명명(命名)의 순간, 머릿속 퍼즐은 평소 맞춰놓은 이미지 그대로 단시간에 대상을 판단한다.
본질을 꿰뚫기 위한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 함을 잘 알기 때문이 아닐까.
어떤 것을 알아가기 위한 시간은 귀찮고 고된 시간이 아니라 즐겁고 설레는 시간이다.
비록 그 이름만으로는 불호(不好)일지라도 알고 보면 진국인 것들이 세상엔 아주 많다.
특히 이런 불호에 속한 것들이 마침내 "싱그러움"같은 것을 보여줄 때, 나는 더 큰 설렘을 느낀다.
늙은 호박의 싱그러운 맛을 상상하며
편견을 넘어서는 것, 본질을 꿰뚫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내게 아침의 라디오가 즐거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