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작가들의 라이프스타일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_최혜진

by 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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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를 하고 충주시 금가면 문산리로 이사를 간 이후, '이제 뭐 할거야?'라는 질문을 종종 받았다. 꿍꿍이가 있는 표정으로 '모르겠다.'라는 대답만 해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 꿍꿍이를 드러내어 '그림책 만드는 사람 되어보려고요.'라고 대답하기 시작했다. 그런 대답을 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 이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그림책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은 이유에 대해 더 명확히 알았다. 그 앎이 수줍어 숨겨온 꿍꿍이를 드러낼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나는 콘텐츠로서의 '그림책' 뿐 아니라, 그림책 작가로서 살아가는 삶, 그들의 삶에 대한 태도를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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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라이프스타일을 지칭하는 단어들이 번져 나갔다.

킨포크(kinfolk)
'친척, 친족 등 가까운 사람'이라는 뜻의 영어이다. 미국 포틀랜드의 라이프스타일 잡지인 <킨포크>로부터 영향을 받아,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며, 자연 친화적이고 건강한 생활양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경향을 말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시사상식사전, 박문각)

휘게(hygge)
가족·친구들과 단란하게 모여 있는, 편안하고 기분 좋은 상태를 뜻하는 '휘게'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소박한 삶의 여유를 즐기는 라이프스타일로, 높은 행복지수를 자랑하는 덴마크 국민들의 행복 비결로 꼽힌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시사상식사전, 박문각)

라곰(Lagom)
'적당한, 알맞은’ 등의 의미를 지닌 이 말은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균형 잡힌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가는 북유럽식 행복한 삶의 철학이다.
출처: 인터넷 교보문고


타인의 기준에 자신을 꿰맞추지 않고 온전히 자신만의 삶의 모양을 찾아가는 위와 같은 풍조가 좋다. 나 역시도 그 풍조에 힘입어 나의 라이프스타일을 찾기 위해 여러 고민과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일 테다. 그 와중에 만난 책이라 그런지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에서도 그림책 작가들의 작품 이외에 그림책 작가들의 라이프스타일에 시선이 갔다. 서로 다른 개성을 품은 다양한 작가들의 이야기가 소개되지만,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한 철학이 오묘하게 겹치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들이 내 마음을 진동시켰다.




좀 못해도 상관없어. 내가 기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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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독특하고 훌륭한 것을 내놓아야 한다는 목표의식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 유일한 창작의 목표는 기쁨입니다. 저 스스로의 기쁨을 위해 이 일을 합니다.

-키티 크라우더


'좀 못해도 상관없어'라고 마음을 내려놓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할 필요가 있어요.
-올리비에 탈레크


작업의 목표가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만드는 것, 내가 소장하고 싶은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바뀌었지요.

엄밀히 생각해보면 스스로를 기쁘게 하는 것 말고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변화는 많지 않아요.

-뱅자맹 쇼


노는 마음이 중요해요. 유희하는 마음은 여유를 낳고, 여유는 작은 용기를 낳으니까요.

-세르주 블로크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잘 해야 한다.'가 나를 움직이는 강력한 동기였다. 하지만 모든 것이 소진된 이후에는 더 이상 '잘'의 압박에 쫓겨 살고 싶지 않았다. 그림책을 만들어보겠다는 결심도 이 '잘'의 압박을 내려놓는 결심과 같이 이루어졌다. 이 책 속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들도 '좀 못해도 된다'는 결심을 한 시기가 있고, 그 결심을 삶 속에 녹여내기 위해서 '놀이'와 '유희'의 장치를 마련해 놓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창작자로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잘 하고 싶은 마음'을 완벽하게 다스리고 있다기보다는, 그 욕심을 내려놓기 위해 열심히 줄다리기하며 살고 있는 그들의 삶이 내게 와닿았다.


사람 변하는 게 쉬운 게 아니라지만, 여전히 잘 못할까봐 많은 것을 한참 동안 망설이고 있는 나지만,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느낀다. 위에 인용한 그들의 말처럼, 좀 못하더라도 기쁨이 있기에, 사랑하고 있기에 만족하고 싶다. 나의 첫 그림책은 '좀 못해도'의 결심이 녹아든 결과물일 것이다.




감탄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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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력은 보는 대상에 감정이입을 하거나 감탄할 줄 아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관찰이라는 행위 안에는 사랑의 성분이 분명 들어 있습니다.
-조엘 졸리베

판단 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감탄을 막습니다.
-키티 크라우더

나를 놀라게 하는 무언가와 만나야 생각이 열립니다.
-올리비에 탈레크

어른이 된 이후의 감탄은 결심에서 나옵니다.
-클로드 퐁디



내 친구 중에 감탄을 참 잘하는 친구가 있다. 아주 사소한 것에도 감탄을 하는 편이고, 한 번 감탄을 하면 감탄사를 남발하며, 놀라움에 숨넘어가는 소리를 노래하듯 낸다. 나는 친구의 그런 모습을 좋아한다. 그 친구에게는 내 이야기를 편안히 하게 된다. 내가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이야기를 해도 감탄할 준비를 하며 소중히 여겨주는 그녀의 따스한 태도를 느끼기 때문이다. 감탄하는 능력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이 책을 읽으며 그 친구가 생각이 났다.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감탄을 낳고, 그 감탄이 일상을 풍요롭게 한다는 것을 그녀의 삶에서도 느꼈고, 이 책을 읽으면서도 느꼈고, 내 삶에서도 느끼는 중이다. 감탄이 헤픈 할머니로 늙어가고 싶다.




부모가 되는 시간이 소중할 수 있는 그림책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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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되니 그렇게 바보처럼 놀 권리가 다시 생기더라고요.
아들과 함께 놀면서 그린 그림으로 책을 만들었는데 정말 아름다웠거든요.
-세르주 블로크

엄마 이전에 자기만의 삶을 가진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믿어요.
좋은 엄마가 되는 길은 나 자신의 행복을 디자인해가는 과정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키티 크라우더



이 책의 저자는 그림책 작가들을 인터뷰하면서 '교육'에 대한 질문들을 공통적으로 던졌다. 덕분에 그림책 작가들의 다양하면서도 비슷한 결의 교육철학들을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지에 대한 그들의 생각보다, 그들이 일과 양육을 어떻게 양립하고 있는지에 대해 더 관심이 갔다. 그건 내가 아이를 기르는 것과 일을 하는 것이 양 극단에 위치한 것인 마냥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느끼는 평범한 한국 기혼여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그림책 작가들에게 아이를 낳고 기르는 시간은 아이의 부모로서 느끼는 기쁨들 이외에도 그림책 작가로서 수많은 영감과 깨달음을 얻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했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자녀를 양육하는 시간을 희생이 아닌 보물로 여기는 그들의 말들이 새롭게 느껴질 만큼 내가 마주한 현실이 만만치 않은 것 같다. 위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그림책 작가들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사람들처럼 보여서 부러웠다. 나도 그러고 싶다.




그림책 작가들의 라이프스타일을 탐구하면서, 그들의 삶의 모양이 내가 원하는 삶의 모양과 전방위적으로 잇닿아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내가 그림책 작가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이 책에서 엿본 그들의 삶의 방식은 내가 어떤 직업을 갖게 되든 간에 추구하게 될 것 같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그림책도 너무 좋고, 그림책 작가의 라이프스타일도 너무 좋아져버렸는데, 이십 대 후반에 생겨버린 이 장래희망을 과연 이룰 수 있을까? 싶어 막막하다. 지독한 짝사랑에 빠진 기분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 치고는 너무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 어찌되든 제발 내일은 망설이던 그림책 작업을 진짜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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