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가꾸기_해보는 시간
기적을 믿냐고 묻는다면, 믿는 편이라고 말할 거다. 기대했는데 일어나지 않은 기적도 많지만, 기대치 않았는데 일어난 기적도 많다. 절대 당연하지 않은 크고 작은 기적을 선물 받으며 살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세 번째 집을 만난 것도 우리 삶에 일어난 작은 기적이었다.
예성이는 제대를 했고, 두 번째 집이었던 관사에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 백수 둘은 어서 관사를 나가야 한다는 독촉장과 독촉 전화를 받고 어디로 가야 하나 싶어 막막했다.
처음에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취해 있었다. 충주는 집값이 서울에 비해 쌀 것이고, 빈 집도 많으니까 어디든 우리가 머물만한 곳이 있겠지 싶었다. 그래서 설렁설렁 인터넷도 뒤져보고, 살고 싶은 동네의 부동산도 가봤는데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우리는 다음 직장이 정해질 때까지 잠시 동안 머물 곳이 필요했으나, 단기 계약은 서울과 비슷할 정도로 월세가 비쌌다.
발을 동동 구르며 도저히 뾰족한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충주에 살고 계시는 아빠 친구께 연락을 드렸다. 그분은 내가 아기일 때 나를 봤다고 하는데, 당연히 나는 기억에 없는 분이었다. 그런 낯선 분께 우리의 초라한 사정을 말씀드리며 혹시 아는 공인중개사를 소개해 줄 수 있냐고 여쭤봐야 했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걸 무척 두려워한다. 쑥스러움도 많고 자존심도 세서 나의 어려움을 공개하며 도와달라고 얘기하는 건 내가 참 어려워하는 것 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다른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 본 상황에서 더 이상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렇게 떨리는 마음으로 처음 보는 이름의 어른에게 전화를 드렸다.
결론은, 그분의 도움으로 보증금 200만 원, 월세 33만 원이라는 조건(내가 서울에서 살던 고시원 수준의 가격이었고, 그다음 이사 간 4평짜리 옥탑방 원룸보다 싼 가격이었다)으로 24평 신축 아파트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 충주에서도 단기 계약은 투룸도 월세가 40만 원을 훌쩍 넘는데, 그 시세와 비교하면 아주 좋은 조건으로 계약한 것이다. 노숙 위기의 두 백수에게 일어난 작고도 큰 기적이었다.
세 번째 집은 우선 6개월을 계약했다. 나는 어디에서 살 든지 상관없이 일할 수 있는 직업을 찾고 싶어 했고, 예성이는 불안 요소를 최소화한 형태의 일을 하고 싶어 했기에 예성이의 직장에 따라 우리의 살 터를 결정하기로 했다. 요즘 같은 취업난에 예성이에게 적어도 6개월은, 아마도 그 이상의 취업 준비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 기간 동안은 내가 무슨 일을 해서든지 생활비를 벌기로 했다.
내가 돈 벌 방법을 알아볼수록 충주에는 내가 일하고 싶은 마음이 들만한 일자리가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주변의 편의점 알바, PC방 알바를 알아봤다. 하지만 선뜻 지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간 해 온 공부나, 일한 경험이 아깝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주 가는 카페 사장 언니가 내 사정을 듣더니 갑자기 시청에 전화를 해서 내가 일 할 자리가 있나 알아봐 주었다(난 생각지도 못한 신박한 해결책이었다). 마침 충주 시청 내의 국제기구에서 계약직을 채용 중이었고, 채용 마감 기한을 이틀 앞두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급히 자소서를 써서 냈다. 서류가 돼서 면접을 봤고, 정신을 차려보니 모니터 앞에 앉아 일을 하고 있었다. 이 또한 세 번째 집에서 일어난 기적이었다(사실 내가 좋아할 만한 업무는 아니었지만, 내게 필요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예성이는 3개월 만에 가고 싶었던 회사에 취업이 됐다. 이 역시 세 번째 집에서 일어난 기적이다. 세 번째 집에서의 6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김천이라는 낯선 도시로 이동하게 됐다. 남편 회사에서 주는 원룸을 네 번째 집으로 삼고, 충주와 김천을 오가며 두 집 살림을 시작했다. 아직 세 번째 집을 완전히 떠나온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천천히 이별을 준비한다. 우리에게 일어난 수많은 기적의 배경이었던 세 번째 집의 장면들을 기록하면서 말이다.
잠깐 살 집이라고 대충 해놓고 살지를 못한다. 우리 엄마는 이런 나를 보고 '유난'이라고 했고, 나도 때때로 '이건 병이지' 싶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난 공간에 큰 영향을 받는 사람이다. 한두 시간만 고생하면 몇 달을 행복할 수 있으니까, 나는 그 고생을 사서 한다(사실 내 덕에 예성이가 고생이다. 조명 달기, 커튼 달기, 가구 옮기기 등 대부분의 영역에서 예성의 수고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종종 미안하기도 하지만, 막상 예성이도 가꿔 놓은 공간을 흠뻑 누리는 사람이다. 진짜다. 정말인데.)
세 번째 집의 거실을 가꾸면서 원했던 거는 소파 공간과 테이블 공간을 구분하는 거였다. 그 효과를 서로 다른 높이의 조명으로 구현하려 했지만, 공간이 좁아 맘처럼 되진 않았다. 그래도 만족한다.
집주인 아주머니가 버리겠다는 소파를 덥석 받았다. 이 소파는 우리가 세 번째 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다.
해가 들어오는 시간에 소파에 앉아 유주 나무를 보는 시간을 정말 좋아했다. 세 번째 집에서 키우기 시작한 유주 나무는 내가 예성이 다음으로 아끼는 존재이다. 레옹 저리 가라 할 만큼 화분을 끼고 다닌다. 네 번째 집인 김천 원룸으로 오면서도 데리고 왔다.
내 취향이 아닌 대리석 아트월은 천으로 대충 가렸고, 그 천을 배경으로 우리 집 거실이 영화관이 되고는 했다.
창가에 테이블을 두고 앉아, 식사와 차와 대화 등 소중한 것들을 나누었다.
첫 번째 집부터 시작해서 우리 집의 상징이 된 나무 모빌도 거실 한켠에 달았다.
세 번째 집의 부엌은 예성이의 공간이었다. 내가 생활비를 벌러 회사를 다녔기 때문에 예성이가 살림을 맡았다. 나는 예성이가 싸주는 아침 도시락을 들고 정신없이 출근을 했고, 퇴근만 하면 좀비처럼 뻗어서 예성이가 삼시 세끼를 다 했다. 그렇게 세 달을 살았는데, 예성이가 나보다 살림에 재능 있음을 인정하게 된 시간이었다. 예성이는 이 시간을 계기로 주부들의 외로움과 서러움을 깊게 공감하게 됐다고 한다.
부엌 한 켠에서 제 용도를 잃고 방치됐던 화장대는 그림책꽂이로 새 역할을 맡았다. 이 화장대그림책방을 배경으로 내가 소장한 그림책을 소개할 계획이었지만, 결국 시작만 하고 시간이 흐르고 있다.
부엌의 조명은 이상한 패턴의 꽃이 그려진 플라스틱 조명이었는데, 난 그걸 보기만 해도 스트레스를 받았다. 새 조명으로 바꾸기에는 좀 피곤해져서 레이스 패턴의 테이블 러너로 조명을 가려주었다.
세 번째 집의 침실은 조명을 리모컨으로 끌 수 있었고, 불 끄기 담당(불 끄기 외에도 대부분의 귀찮은 것들이 예성이 담당)이었던 예성이가 세 번째 집과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된 이유였다.
해가 잘 드는 작업실에서 예성이는 주로 공부를 했고, 나는 주로 그림을 그렸다.
세 번째 집에 머무는 짧은 시간에도 손님들이 종종 찾아와 주었다. 옷방과 손님방을 같이 썼는데, 언젠가는 정말 손님들만을 위한 방을 마련하고 싶다.
세 번째 집을 채운 기적 같은 순간들이 나와 예성의 마음속에 남아 있다.
낯선 곳에서 처음부터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하는 지금,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덜컥 겁이 날 때마다 우리의 세 번째 집을 떠올릴 것 같다. 세 번째 집은 우리에게 '기적'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용기'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