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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히 Mar 18. 2019

우리의 네 번째 집

공간 가꾸기_해보는 시간

김천이라뇨


지금까지 살았던 도시들을 떠올려 본다.


지난 30년간 경기도 여주, 충청남도 서산, 인천, 경상북도 포항, 서울, 충청북도 충주에 살았었다.


이 도시들 모두 주민등록증 뒷면에 흔적을 남길 만큼 제법 긴 호흡으로 머물렀다. 태어나보니, 때로는 어쩔 수 없이 그 도시에 살아야만 하는 상황도 있었다. 하고 싶은 공부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그러다가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내가 살 도시를 선택했던 때도 있었다. 그리고 이제 또다시 새로운 도시에서의 삶을 시작한다. '김천'이라는 어느 낯선 도시이고, 이번 경우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속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서울에 살지 않기로 결정했었고, 서울이 아니더라도 매력적인 도시에서 살고 싶었다. 왠지 한 번쯤은 여행 가고 싶어 지는 춘천, 강릉, 광주, 전주, 군산, 경주, 부산, 제주 같은 곳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름이 예쁜 곳에 살고 싶었다(이름 예쁜 곳에 살고 싶다고 하면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만, 나는 진짜 진지했다). 예를 들어 뭐 있는지는 잘 몰라도 이름이 예쁜 '진주시'같은. 그런데 김천이라니. 김천으로 여행 가는 사람 못 봤고, 이름도 너무 안 예쁘다.


내가 갖고 있는 김천에 대한 정보는 딱 하나였다. 사랑하는 친구의 고향(지금 이 친구는 미국에 산다. 내가 틈만 나면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꼬시는 중이다.). 김천도 딱 한번 가봤는데 그 친구 결혼식 때문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김천이 어디냐고, 김밥천국이냐고, 거긴 아무래도 김이 특산품일 것 같다고(김천엔 바다도 없는데) 놀렸다. 나도 처음엔 웃겼다. 그렇게 헛웃음이 나오는 곳에서 아무래도 꽤 오래 살게 될 것 같다.


이유는 내 인생 공동체원(a.k.a 남편) 예성이가 김천에 취업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전형적인 회사생활보다는 시간과 장소의 자유를 누리며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기에, 안전한 회사생활을 원하는 예성이의 직장이 어디로 결정되느냐에 따라 살 터를 결정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니 이제 꼼짝없이 김천에 가게 된 거다. 예성이가 백수 된 지 7개월 만이었다. 백수 신분으로 함께 여행을 다녀온 뒤 예성이가 본격 취업준비를 하며 살림을 하고, 내가 회사를 나가 생활비를 번지 3개월 만이기도 했다. 좀 더 긴 취준 시간을 각오했었기에 갑자기 다가온 커다란 변화에 당황했다. 물론 예성이가 일하고 싶은 회사에 취직이 된 건 무척 기쁜 일이었지만, 불현듯 내 인생이 겁이 났다.


결혼을 하고 살게 된 서울에서의 첫 번째 집, 충주에서의 두 번째, 세 번째 집은 한동안만 머무는 곳이었다. 어디론가 다음 행선지로 떠난다는 게 확실했다. 그래서 어디를 살든 여행같이 재밌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김천은 다르다. 사람 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지만, 별일 없이 시간이 흐른다면 우리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될 때까지 김천에 있을 수도 있다. 매번 제법 가벼운 마음으로 터전을 옮겨 다녔는데 이번만큼은 그렇지가 않았다.


서울에 살지 않겠다는 선택은 자의였지만, 그렇다고 내 사람들과 너무 멀리 동떨어졌고, 여행지 같은 매력은 알려진 바가 없고, 이름도 안 예쁜 곳에서 살게 된 건 타의였다. 자의 반 타의 반의 이유로 김천에 살게 된 건 내 마음을 점점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좋아하는 것들과 재밌는 것들이 서울 쪽에 가득한데, 거기로부터 너무 멀어지는 거 같아 종종 겁이 났다. 꼭 서울이 아니더라도, 어느 매력적인 도시의 색에 묻어가면서 다채로운 삶을 채우고 싶었는데, 아무것도 모르겠는 이 곳에서는 왠지 홀로 외로울 것만 같았다.


그렇게 마음을 충분히 다지지 못한 채 네 번째 집으로 이사 왔다.




천천히 받아들이는 시간


우선 네 번째 집은 김천에서 살 집을 찾을 때까지 잠깐 동안 머물 곳이었다. 예성이가 당장 출근을 해야 했기 때문에 회사에서 급한 대로 원룸이 나왔다. 온갖 기스 다 난 중고차여도 불가능한 게 없는 기특한 우리 차에 가득 짐을 실어 셀프 이사를 했다. 처음 갈 때만 해도 길어야 한 달 정도 머물 곳이라 생각했는데 어쩌다 보니 두 달 정도 머물게 됐다.



사실 '집'보다는 '임시거처'의 성격이 강했다. 처음에는 김천에 가는 것도 마음에 안 드는 판에, 그냥 대충 해두고 살까 싶었다. 그런데 나를 위해서라도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내가 이 공간에서 머무는 시간을 잘 돌봐야만 했다. 준비되지 않은 마음을 천천히 다듬고, 김천에서의 새로운 챕터를 건강히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래서 굳이 '네 번째 집'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래서 도대체 잠깐 사는 집에 나무 사다리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는 예성이의 의아한 표정을 무시하며 굳이 내가 좋아하는 사다리를 꾸역꾸역 차에 싣고 왔다. 새로 만날 공간과 거기 머물 나 자신을 잘 돌보겠다는 의지였다. 그렇게 8평 남짓한 원룸에서 예성이와의 첫 김천 생활을 시작했다.



네 번째 집이라고 해서 뭐 특별하게 꾸민 건 아니고, 원래 가지고 있던 것들 중 아끼는 사물들만 가져와 이 작은 공간을 채웠다. 충주 집에 많은 짐을 내버려두고, 최정예 군단으로만 꾸려온 짐들로 두 달을 살아보니, 사람이 사는 데 많은 짐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체감했다. 난 좋아하는 게 많아 미니멀리스트가 될 결심은 아예 하지도 못 하고, 사실 이때 가져온 짐도 꼭 필요한 것만 가져왔다고 하기엔 너무 '사다리'같은 것까지 챙겨 왔지만, 비교적 적은 짐으로 살았던 원룸에서의 생활을 통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감각이 예리해질 수 있었던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내 필요의 기준에서는 여전히 저 사다리 너무 필요한 거다.



너저분하게 놓여 있던 것들이 자기의 자리를 찾았을 때의 만족감을 좋아한다. 네 번째 집 안에서 애정 하는 사물들이 제 자리를 찾아가니, 나도 조금씩 김천의 작은 원룸에 있는 우리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우리도 우리의 자리를 찾아가는 중이었던 거다.





네 번째 집에서 지내는 두 달 동안 제법 많은 도전들이 있었다. 글로 돈을 벌어보고 싶다는 마음을 실행에 옮겨볼 기회를 만나 재택으로 일을 시작했다. 상상하기로는 잘 가꾼 원룸에서 책상에 앉아 일에 몰두하고 싶었지만, 나는 이렇게 누울 곳이 바로 옆에 있는 곳에서 집중해서 작업을 할 수 있을 만큼 심지 곧은 사람이 아니었다. 덕분에 몇 안 되는 김천의 카페를 열심히 누볐다.


일 외에도 배우고 싶었던 미싱을 배우기 시작했고, 운동으로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들이 조금씩 균형을 잡아가며 생활의 기반을 잡아주었다. 예성이 역시 뽀시래기 신입사원으로서 겸손히 배우며 만족스러운 회사생활을 해내고 있다. 그렇게 '김천'이라는 낯선 도시 앞에서 복잡했던 마음이 조금씩 고요해졌다.


[두 달 동안 찾은 김천의 장점]

좋아하는 김연수 작가님 고향이 김천

선택권이 많진 않아도 있을 건 있음 : 미싱 공방 하나, 애정 하게 된 카페 하나, 좋은 필라테스 학원 하나 등

역시나 집 값이 쌈

초록이 잘 보임

과일나무가 많아서 봄 맞아 핀 꽃들이 예쁨

비싸도 편리한 KTX 역이 5분 거리

주변에 대구, 구미 등 놀러 갈 만한 도시가 있음





여전히 내 마음에는 김천에서 사는 삶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 두려움도 있다. 하지만 네 번째 집에서 천천히 워밍업의 시간을 보내면서, 결국 누구와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어디서 사는지, 그 도시의 이름이 예쁜지 안 예쁜지는 중요한 게 아닌 거라는 사실이 이제야 조금 삼켜진다. 보고 싶은 얼굴들을 마음대로 볼 수 없는 곳에 산다는 것은 종종 날 우울하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어질 인연들은 깊어질 것이고, 이 곳에서 만날 선물 같은 인연들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


그렇게 적당한 속도로 준비한 뒤 오늘 다섯 번째 집으로 이사를 했다. 어디서든 우리답게, 재밌게 살자고 예성이랑 작당하며, 김천에서의 새로운 챕터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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