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정히 Apr 04. 2019

느낌의 공동체

함께_해보는 시간

당연히 함께였던 10년


기숙사 생활을 10년 동안 했다.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

보통 친구들과 함께 4명이서, 2층 침대 두 개를 두고 한 방을 나눠 썼다. 한창 예민한 시기에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을 타인과 몸 부대끼며 채워갔다. 긴 무리 생활이 버거울 때도 있었고, 재미있을 때도 있었다. 그 10년이 내게 남긴 것들이 분명히 있다.


가장 소중한 건 같이 늙어가고 싶은 진한 친구들을 얻은 거다. 보통은 엄마 아빠한테 허락받고 간신히 친구 집에서 잘 수 있을 텐데, 난 친구들과 자는 날이 가족들과 자는 날보다 많았다. 그렇게 친구들과 함께 가장 못나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서로를 마주하고, 알아가고,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연습들을 해나갔다. 서툴렀고 예뻤던 시간이다. 그렇게 함께하는 법들을 익혀갔다.

어른이 된 어느 날 친구가 '너의 온도는 참 적절해'라는 말을 해 주었는데, 나는 그 말이 좋았다. 그리고 지금 내가 지닌 온도는 그 말을 해 준 친구를 비롯하여, 나와 함께 살았던 타인들이 천천히 다듬어 준 온도일 거라 생각했다.


긴 무리 생활의 부작용으로는 혼자 잘 못 잔다는 게 있었다. 누군가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잠드는 게 습관이 됐다. 중고생 시절뿐 아니라 대학생이 되어서도, 방학이 되어 내 방이 있는 집에서 혼자 잘 때면, 아무 소리 없는 정적이, 이 공간에 나 혼자 있다는 느낌이 나를 말갛게 깨웠다. 눈을 질끈 감고 양을 세다가 양들을 하나씩 색칠하고 있는 지경에 이른다. 결국 다 큰 딸은 엄마 아빠가 자고 있는 안방 문을 최대한 소리 안 나게 살짝 열고, 그 틈으로 베개와 덮는 이불을 들고 살금살금 들어간다. 차마 침대에 눕기엔 염치가 없어서 바닥에 덮는 이불을 반으로 접고, 그 이불 사이에 쏙 들어가 몸을 웅크린다. 딱딱한 바닥에 몸이 배겨도, 엄마 아빠의 숨소리를 들으면, 이상하도록 잠이 솔솔 왔다. 나중에 내가 결혼하고 나서, 엄마 아빠는 내가 참 눈치 없는 딸이었다며, 그제야 내가 방해꾼이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진심으로 미안하고 웃겼다. 그래도 가끔은 눈치가 보여서 남동생이 자고 있는 방바닥에 누워서 자기도 했다. 멀쩡한 내 방을 놔두고 다른 사람의 숨소리를 찾아 새벽을 헤매는 건 여러 사람에게 피곤한 일이었다.


고개를 들면 항상 사람이 있는 광경이 익숙한 사람으로 살아왔고, 그렇게 타인과 함께하는 삶이 내겐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 무리 안에서 난 안정감을 느꼈다. 무리가 주는 안정감이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컸다는 걸 후에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비로소 알았다.




혼자서는 잘 못하는 어른


이제 고개를 들면 남편 한 명 있거나, 아무도 없는 환경 속에 산지 어느덧 2년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연고 없는 지방 도시에서의 삶을 결심하고, 그로 인해 잃는 것들을 감수하기로 했다. 하지만 유독 쉽게 감수가 안 되는 영역이 내 사람들로부터 물리적으로 멀어지는 것이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우르르르 움직이며 하고 싶은 것을 함께 만들어내는 삶을 살아왔었는데, 이제는 혼자서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게 생각보다 버거웠다.


더 어렸을 때는 '꺼야 꺼야 할 거야, 혼자서도 잘할 거야'라는 노래를 좋아했다. 혼자서도 뭐든 잘하는 어른이 빨리 되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어른이 되어보니 난 혼자서는 잘 못하는 게 많았다. 사람들과 함께하는 법은 수년의 시간 동안 수련하다시피 익혀왔지만, 오히려 혼자 하는 법을 잘 모르는 나였다. 지난 2년은 그걸 인정하게 될 때까지 온 힘을 다 썼던 시간이었다.  


물론 남편이 있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혼자라고 할 수 없고, 타지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도 있는 것이지만, 내가 고민하는 건 정서적인 외로움을 넘어선 것들이었다. '무엇을 하느냐'의 영역이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그것을 함께 해나갈 수 있는 동지들을 모으는 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었다. 그런데 동지들을 다 서울 쪽에 둔 채 나 홀로 경상도 주민이 된 이상 뾰족한 수가 없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혼자서 해내야 했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글을 쓰는 건 물론이고 그 외에도 표현하고 싶은 것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 만들어내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제일 만들고 싶은 것은 그림책이었다. 여기서 문제는 내가 그림을 잘 못 그린다는 사실이었고, 거기서 더 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퇴사 후 내가 하고 싶은 것에 시간을 투자할 수 있었고, 하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혼자서 막막하더라도 잘 해내 보려고 아등바등해봤다. 하루 전날 다음날의 계획표를 만들기도 하고, 엉뚱한 데에 시간 쓰진 않았는지 점검하기 위해 그 날 하루를 어떻게 살았는지 기록하기도 했다. 다이어트 성공 비결이 주변 사람들에게 다이어트한다고 떠들고 다니는 거라길래, 나 역시도 그림책 작가가 되고 싶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녔다. 그렇게 하면 부끄러워서라도 최선을 다하지 않을까 싶었다. 집에서는 집안일이 눈에 밟혀 집중이 안 되길래 카페 비용을 각오하고 쏘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애쓰는 중에 무리 안에서는 잘 체감하지 못했던 혼자서의 무기력함을 알았다. 무리 안에서는 얼추 성실했던 내가 혼자서는 얼마나 나태해질 수 있는 지도 알았다. 이런저런 시도들은 그럴싸한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묻혀버렸다.


작년 말,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러 서울에 올라간 날이었다. 혼자서는 잘 못하는 스스로를 적나라하게 직면하고 힘이 빠져있는 내게 친구가 '그래서 지금 너에게 제일 필요한 게 뭐야?'라는 질문을 던져주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내고, 살고 싶은 삶을 살아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것을 함께 해나갈 수 있는 동지였다. 하지만 동지가 되고 싶은 사람들은 너무 멀리 살고, 그렇다고 내 가까이에서 새로운 사람을 찾는 것도 어렵기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친구의 질문에는 횡설수설하다가, '아직 좀 정리가 필요한 것 같아'라는 말로 대화를 닫았다. 그런데 다음 날 멍하니 시선을 던지다 '느낌의 공동체'라는 단어를 봤다. 책 제목이었다. 책 내용이 뭔지는 전혀 모르지만, 그 책 제목만으로 난 내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마주할 수 있었다. 난 '느낌의 공동체'가 필요했다.





느낌의 공동체


난 서로를 지탱해줄 수 있는 공동체가 필요했다. 공동체의 사전적 정의가 '생활이나 행동 또는 목적 따위를 같이하는 집단(출처: 네이버 국어사전)'인데, '생활'을 제외한 '행동과 목적'을 같이하는 공동체를 원했다. 함께하면서도 상호 간의 개입에 적절한 거리와 존중이 있을 수 있는 자유로운 공동체 말이다.


현실적으로 내가 공동체를 이루고 싶은 사람들은 나와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에 어쩔 수 없는 거리감이 존재했다. 그 거리감을 인정하면서도 그들과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느낌의 공동체'라는 말이 그 적당한 무게와 거리를 적절히 표현해 주었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그 균형의 지점을 콕 집어주는 거 같았다.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들로 각자의 자리에 있는 친구들과 느낌의 공동체들을 이루기로 했고, 나와 비슷한 필요를 느끼는 친구들과 함께 작당했다.




[겹겹]

겹겹은 하고 싶은 일을 함께 해나가는 공동체이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라는 말씀에서 '겹겹'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나에게 '그래서 지금 너에게 제일 필요한 게 뭐야?'라고 물어봐 준, 나와 비슷하게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친구와 시작했다.


이렇게 한 팀이 되어, 분명하고 싶은데 혼자서는 잘 되지 않는 것들을 함께 끌어주기로 했다. 결국 잘 되지 않았을 때는 함께 격려하며 다음 발을 딛기로 했고, 조금씩 이루어 낸 것들을 함께 기념하고 맘껏 기뻐하기로 했다.


우리는 2주에 1번씩 화상 채팅으로 만나서 각자의 작업의 진행상황, 그 과정에서 느낀 것 공유하며 영감을 나눈다. 그러고 나서는 다음 2주에 대한 계획을 다잡으며 하고 싶다고 생각한 일을 계속해나갈 원동력을 얻는다. 최근에는 친구의 상황에 변화가 생겨서 평일에도 종종 만나고 있다. 둘 다 글 쓰는 걸 좋아하고 필요로 하기에, 시간을 정해두고 화상으로 만나 각자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겹겹 라이팅' 시간도 갖기로 했다. 또 공동 계좌를 파서 워크숍 비용(놀러 갈 속셈)을 모으고, 매년 말에 각자와 우리의 크고 작은 실패와 성취들 기념하는 파티를 갖기로 했다.


하고 싶은 작업과 놀고 싶은 그 어딘가 사이에서 궁리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뭉무키]

올해 초 함께 떠난 두 친구와의 여행에서, 한 친구는 자신의 새해 바람으로 묵독 모임을 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그 바람을 그 자리에 있던 나와 다른 친구가 냉큼 받아먹어 지금까지 즐겁게 따라가고 있다. 매주 월요일 아침 10시에는 자신이 있는 곳 어디에서든지 책 읽으며 앉아있기로 했고, 그 시간을 함께 보내기로 했다. 덕분에 책을 꾸준히 붙들고 있다.




[평일공작단]

평일공작단은 나처럼 집에서 보내는 시간을 잘 관리하고 싶은 필요를 느끼는 친구와 평범한 일상을 잘 관리해보자는 목적으로 시작했다. 친구는 번역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번역 공부를 시작했고, 나는 최근에 시작한 재택 업무와 하고 싶은 개인 작업을 균형감 있게 잘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집에서는 그냥 눕고 딴짓하게 되기 일쑤였다.


그래서 친구와 나는 일주일에 두 번(월요일, 수요일)에 오전 9시에 스카이프로 만난다. 하루 계획을 나누고 서로를 응원한 뒤 스카이프를 켜 둔 채 6시까지 지낸다. 서로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덜 눕게 되고, 조금 더 긴장하게 된다. 그렇게 하루를 살며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를 기록하고 밤 10시에 공유한다. 이런 식으로 하루하루를 튼튼히 다지고 있다.





혼자서 잘 못하는 내가 이제 함께할 사람들을 찾았다. 비록 내 옆에서 같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21세기에 태어난 덕에 화상 통화를 도구로 내가 같이 하고 싶은 사람들과 일종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느낌이다.


이러한 행동들이 얼마나 이어질 수 있을지, 어떤 모양으로 발전할지, 그 과정에서 무엇을 배우고 느낄지는 나도 처음이라 잘 모르겠다. 그래도 덕분에 혼자라서 쉽게 무너지고는 좀처럼 빠져나올 수 없었던 무기력함에서 졸업했다. 덕분에 어제보다 좀 나아진 오늘을 살고 있는 기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의 네 번째 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