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라메_해보는 시간
손길이 느껴지는 무언가를 좋아한다. 삐뚤빼뚤해도 돼서 좋다. 만든 이가 지닌 손의 온기를 상상할 수 있어서 좋다. 천천히 만들어진 시간이 느껴져서 좋다. 그래서 마크라메가 참 좋았다.
[마크라메: 아라비아에서 발생한 레이스로, 은 실이나 가는 끈을 나란히 하여 손으로 맺어 무늬를 만들거나 장식품이나 실용품을 만드는 수예(두산백과)]
마음으로만 좋아하던 것들을 직접 해보고 싶어 하는 중인데, 마크라메는 꼭 해보고 싶어서 오래전에 실도 사 놓았었다. 역시나 사놓고는 시작을 못했다. 덜컥 어렵게만 보였고, 그 벽을 넘을 만큼의 힘이 안 났다. 그런데 마침 작년 11월에 떠났던 치앙마이 여행의 첫 숙소 호스트 언니가 마크라메 클래스를 열고 있었다. 내가 가고 싶었던 치앙마이에서 하고 싶었던 마크라메를 배울 수 있다니 설렜다.
호스트 언니는 마크라메를 독학으로 해내셨다. 동기를 물었는데, 밤이 긴 치앙마이에서 심심해서 해봤다고. 심심함은 참 예쁘고 소중하다. 심심함을 가져오는 비어있는 시간이 무언가를 해볼 수 있는 힘의 원천이구나 싶었다. 하얀 실을 만지면서 하얗게 비워야 할 나의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호스트 언니의 코치를 받으며 작은 매듭들을 차곡차곡 쌓았다. 내가 바라던 큰 그림이 천천히 만들어졌다. 원했지만 해내지 못했던 것이 내 손을 통해 실체화되는 것을 보는 게 순수한 기쁨을 안겨주었다. 이렇게 해본 누군가가 해보려는 누군가에게 디딤돌을 놔줄 수 있구나 생각했다.
치앙마이에서 만들어온 나의 첫 마크라메는 우리 집 침대 위에 제 자리를 잡았다.
충주에 내려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이 아파트 옆라인에 나와 예성이와 같은 대학을 나온 신혼부부가 있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하지만 처음 들어보는 낯선 이름들이라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렇게 넘어간 시간이 아쉬울 만큼 그 낯선 이름들과 소중한 인연이 되었다.
그렇게 동네 친구가 생긴 뒤에 갖가지 재밌는 일들을 함께했다.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는 북살롱을 열었고, 월, 수, 금 아침마다 재즈댄스 학원을 함께 다녔다. 남편들이 집에 안 들어오는 당직 날에는 외박을 허락받은 십 대 소녀들 마냥 신이 나서 밤늦게까지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내가 배운 마크라메를 그 친구에게 처음 알려주었다. 내가 연 첫 마크라메 클래스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내가 누군가를 알려줄 수 있을 만큼 실력이 있지가 않았다. 나는 딱 한 번 마크라메를 만들어봤을 뿐이고, 내가 만든 문양 이외의 다른 문양의 마크라메는 어떻게 만드는지 1도 모르는 왕초보였다. 완벽주의자 성향이 강하고, 잘하지 못하는 걸 타인 앞에서 하는 걸 무척 두려워하기 때문에 마크라메를 알려달라는 친구의 요청을 듣고 걱정이 많이 됐다.
동시에, 비록 나는 딱 한 번 해본 사람이지만, 해보고 싶다는 친구의 마음을 응원하고 싶었다. 충주 같은 작은 도시에서는 해보고 싶다고 해서 바로 할 수 있는 기회들이 가까이에는 별로 없다. 치앙마이까지 가서 마크라메를 배운 한 사람으로서 해보고 싶은 동네 친구의 마음이 더욱 소중했다. 결국 내가 만들어 본 것과 똑같은 마크라메를 친구에게 가르쳐주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딱 내가 아는 것만큼만. (하지만 그것도 그 전날 새벽 3시까지 연습했다. 정녕 제 버릇 개 못 주는 걸까.)
사실 '가르친다'라는 동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시간이었다. 같이 연구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줄곧 까먹었고 허둥지둥 거렸다. 난관에 부딪혔을 때 멋있는 해결사 역할을 하지는 못하고 같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그렇게 친구는 나를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마크라메를 정복해갈 수 있었달까. 중요한 건 서로에게 재미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가르치는 이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친구는 그 이상의 것을 만들었다. 내가 가르쳐준 것을 새롭게 응용하여 친구만의 새로운 마크라메를 만든 것이다. 친구의 손길이 만든 새로운 문양들을 보며 손으로 만드는 것에는 그 사람이 녹는다는 것을, 그 고유한 매력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친구에게 마크라메를 가르쳐 준 날을 계기로 마크라메가 손에 붙었다. 자신감도 조금씩 더 붙었다. 이제는 틈이 날 때마다 나뭇가지를 주워와 하얀 실을 가지고 사부작거리고 있다.
1.
홀로 만든 첫 마크라메는 얇은 실로 만든 작은 마크라메였다. 가운데에 내가 애정하는 연분홍 천일홍을 꽂아 두니 제법 어울렸다. 처음 혼자 만든 것인 만큼 어설픈 느낌도 있었지만 내 눈엔 참 소중하고 사랑스러웠다. 만드는 내내 생각났던 고마운 사람이 있어 수줍게 선물로 전했다.
맘에 들어 할까 반신반의하며 보냈는데, 다행히 수신자는 예쁜 미소로 기뻐해 주었다. 나는 마음이 담긴 고퀄 인증샷을 선물 받았다. 내가 직접 만든 무언가를 선물하는 기쁨은 무척 컸다. 선물 자체뿐 아니라, 그 선물을 만드는 시간 안에 내 진심을 가득 담을 수 있었다. 앞으로도 종종 내가 만든 것을 선물하는 사람이고 싶다.
2.
마크라메 작업 공간은 내 책상 위다. 스탠드 목에 걸어두고 작업을 한다. 제법 단순노동이기 때문에 한 켠에는 보고 싶은 무언가를 틀어놓는다. 요즘은 빨강 머리 앤을 정주행 중이다.
그렇게 완성한 두 번째 마크라메는 안 해 보았던 새로운 문양들을 시도해보았다. 작은 매듭들이 쌓여서 만드는 문양들이 참 곱다.
3.
마크라메의 이름이 ‘마크라메’인지도 모르고 좋아했던 옛날부터 무지 갖고 싶어서 여러 마크라메 행잉 플랜트를 장바구니에 넣어두었었는데 틈틈이 마크라메를 연습하다 보니 왠지 내가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허둥지둥 거렸지만 결국 만들었다. 갖고 싶어 했던 걸 사지 않고 직접 내 두 손으로 만들어내니 무척 뿌듯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다양한 영역에 도전하고 싶었는데 마크라메에 대한 도전이 순항 중이어서 기쁘다. 앞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될 내 손길의 결과물들이 기대된다. 즐겁게 만들어서 적절히 채우고, 풍성히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