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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렁뚱땅 여행

무작정 여행 떠나는 법

by 다정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 그런 이야기를 봤다. <무작정 여행 떠나는 방법> 중 하나로 '집 앞 버스정류장에서 몇 번째로 오는 버스를 타서 종점까지 가보기' 혹은 '몇 번째 정류장에서 내리기'가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동네를 걷는 것만으로도 여행을 떠난 것 같은 기분이 느껴지고 새로운 영감을 얻거나 충전이 될 거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돌아올 때는 건너편에서 탔던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 되니 길 잃을 걱정도 없는 안전하고 신박한 방법이었다. 무작정 떠나고 싶은 순간 한 번쯤 해보고 싶은 방법이었지만 막상 그 순간이 와도 해보진 않았다. 무계획이라는 계획을 세우는 편이라 얼렁뚱땅 여행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 같다. 그 이야기를 알게 된 지 10년도 더 된 지금에서야 얼렁뚱땅 여행을 다녀왔다. 심지어 버스도 아니고 두 발로 시작했다.




오빠와 나는 늘 어디서든 잘 자는 편인데 요즘 들어 오빠가 밤잠 설치는 일이 많아졌다. 내가 허리를 삐끗하는 바람에 아침 러닝도 못 한지 1주일이 되는 시점이니 아마도 오빠는 꿀잠을 자기엔 체력이 남은 듯했다. 땀을 내기 위해 야외활동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어떤 야외활동을 해야 할지 을숙도, 삼락생태공원, 집 뒷산 등 여러 후보를 고민했는데 가뜩이나 피곤해하는 오빠가 운전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해 집 뒷산을 오르기로 했다.


집 뒷산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1월 1일 이후 5개월 만에 오르는 거다. 산 입구까지도 걸어서 올라가기로 하고 휴대폰, 물 한 통만 챙겨 집을 나섰다. 너무 오랜만에 오르막을 걷는 거라 산 입구까지 약 8분 정도 걷는 것도 힘이 들고 땀이 나기 시작했다. 산 입구에서 물을 한 모금씩 나눠마시고 본격적인 등산을 시작했다. 1월 1일에 한 번 걸어봤다고 눈에 익숙한 길들이었다. 길이 잘 닦여져 있어 어렵지 않게 오르고 풍경도 눈에 담았다. 소나무가 빽빽한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맑아지는 듯했다.


편안한 길로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 시점에서 그 옆 샛길로 걸음을 옮겼다. 사실 1월 1일에도 정상을 가려고 했는데 이 샛길을 놓쳐서 앞으로 걷기만 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진짜로 정상을 가는구나 하며 신나기도 하고 조금 떨렸다. 잘 정돈된 큰길이 아니라 나무와 나무 사이, 사람이 걸어서 만든 길을 걷자니 이제 진짜 등산이구나 싶었다. 샛길로 들어서자마자 난이도가 높아졌다. 길이 좁고 낙엽이 많아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 디딜 곳을 확인해야 했다. 오빠도 정상은 처음이라 이 길이 맞는지, 정상까지 얼마나 걸리는지도 모른 체 무작정 걸었다.


'젖은 흙냄새 너무 오랜만이다. 습해서 땀이 금방 나네. 오빠도 땀나는 거 같은데 오늘은 꿀잠 잘 수 있겠지?'


걷다 보니 이런 생각도 웃음기도 사라졌다. 호흡하며 걸음에만 집중했다. 잡념이 땅 밑으로 사라지고 나만 남았다. 마침 '싯다르타'를 읽고 있는 터라 이게 수행처럼 느껴졌다. 호흡과 걸음, 현재에만 집중하는 것. 매일 무언가에 쫓기듯 살면서 평상시에는 하기 어려운 거였다. 역시 머리가 복잡할 땐 몸을 힘들게 해야 하나 보다.


천천히 쉬지 않고 걸으니 커다란 바위가 나왔다. 이게 정상에 다 와간다는 표식 같았는데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상이 나왔다. 커다란 돌탑이 4개나 있고 나무 사이로 사상 건너편까지 한눈에 보였다. 바다가 안 보여 아쉬웠지만 익숙하지 않은 길을 땀 흘리며 올라와 정상에 도착한 성취가 아쉬움을 가릴 정도로 컸다.


기념사진을 찍고 하산을 시작했다. 올라온 길을 되돌아 내려가지 않고 눈에 보이는 길을 따라 걸었다. 하산하기 전 지도를 확인한 오빠는 우리가 정반대로 갈 수도 있다며 "갈림길이 나오면 지도를 봐야 해."하고 주의했지만 나는 익숙한 산인 것처럼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내리막이 가팔랐지만 오르막보다 훨씬 여유로워져 어제 봤던 <미션 임파서블>과 저녁 메뉴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그리고 갈림길, 오빠는 지도를 켰고 우리가 이미 반댓길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산을 빙 둘러가기엔 너무 멀고 되돌아갈 엄두도 안 나서 그냥 쭉 내려가 버스를 타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내려오니 완전 처음 보는 동네였다. 우리 동네에서 올라올 때는 아무것도 없고 등산로 입구만 있었는데 반대쪽으로 내려오니 거의 관광지였다. 파전에 막걸리를 파는 가게부터 옥수수와 어묵을 파는 작은 노점, 블루리본을 받은 베이커리 카페와 커다란 주차장. 차도 사람도 많아 정신없는 와중에 간판부터 도로까지 분홍색 천지라 혹시 영화 세트장은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다. 정말 갑자기 다른 세상이었다. 오빠에게도 낯선 동네라 지도를 보니 구덕터널 위쪽에 있는 동네였다. 우리는 구덕터널만 다니기에 실제로도 올 일 없는 동네였다.


"이런 게 우연이 만드는 재미인가 봐."


걷기만 했는데 처음 보는 동네라니 이 상황이 너무 웃겼고 무던한 오빠가 이렇게 말하니 더 들떴다. 같은 한국, 심지어 부산인데도 여행 온 기분이 들었다. 외국인처럼 우와 하며 구경하다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는 참새처럼 베이커리 카페를 한 번 구경하고는 다시 오기로 약속했다. 우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을버스 정류장을 찾았는데 도로 가운데 '꽃마을 프로방스'라는 조형물이 있었다. 익숙하지만 낯선 프로방스라는 단어가 이 동네와 정말 찰떡이었다. 처음인 동네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환승해 점차 익숙한 우리 동네로 오는 모든 과정이 새롭고 즐거웠다. 물론 우리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는 GPS덕에 마음껏 헤맸지만 얼렁뚱땅 여행이 주는 재미와 색다름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는 하루였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오빠와 함께 하며 감정을 나눴기 때문에 즐거움이 배가 되었다. 언제 꽃마을 프로방스를 다시 가게 될까? 좋은 꿈을 꾼 것 같은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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