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나쁜 일》
하루 만에 《급류》를 읽고 나니 다음 책도 장편 소설을 읽고 싶어졌다. 도서관에서 국내소설 코너에 가서 섰다. 제목을 쭉 따라 읽다가 익숙한 책등을 봤다. 민음사 출판사의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였다. 고민 없이 책을 뽑아 뒤표지를 봤다.
처음에는 연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다음에는 호기심이 동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결국에는 돈 때문이었다.
소설 속 문장과 함께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자들의 절박함을 담보로 진화하는 지능적, 조직적 범죄!'라는 자극적인 설명, 《가장 나쁜 일》이라는 제목이 만나 머릿속에서 유레카처럼 반짝였다. 바로 대출해 호기롭게 읽기 시작했지만 처음부터 속도가 붙진 않았다. 등장인물이 많고 그 삶이 벅차서 이 세계에 발을 붙이고 주인공 곁에 있는 게 어려웠다. 그럼에도 '도대체 왜?'라는 의문이 풀리지 않고 답을 짐작할 수 없어서 정희의 고군분투를 힘겹게 따라가 봤다.
정희는 3년 전 아이를 잃고 생기를 잃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정희를 바라보기 버거웠다. 아이가 아프기 시작한 이후의 순간을 모두 곱씹으면서 다른 선택을 가정해 보고 그때의 결정을 후회하고 아파하고 절망하는 모습이 글자로 묘사되었지만 너무 생생해서 마음이 아프고 절절했다. 이미 간신히 삶을 버티고 있는 정희에게 나쁜 일이 계속 찾아온다. 남편인 성훈이 눈앞에서 사라지더니 흔적을 찾을 수 없고,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 기도했다는 소식에 이어 성훈의 죽음을 마주한다. 이를 받아들이기도 전에 사실 성훈이 불륜 중이었으며 상대의 이별 통보를 받아들이지 못해 상대를 죽였다는 사실까지 드러난다.
삶에 고난이 있다고 한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무엇이 가장 나쁜 일일까 꼽기 어려울 정도로 쉼 없이 파도가 몰아쳤다. 이대로 삶을 포기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크고 사나운 파도였다. 정희는 한차례 쓰나미를 겪고 더 연약해진 상태였기에 더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작은 의문점들이 정희를 버티게 만든다. 어떤 의욕이랄 게 없는 상태였지만 석연찮은 점을 풀어내려고 노력한다. 왜 말하지 않았을까? 이름 모를 사람의 천도재는 왜 지냈을까? 왜 옥상이 아니라 9층에서 떨어졌을까? 성훈을 상상하면 그려지는 모습이 있지만 아닌 모습들도 있다. 잘라버리는 게 편하겠다 싶은 얽힌 실타래를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풀어간다. 삶의 동반자를 직감적으로 이해하며 작은 의문점들에 답을 찾아 헤매는 모습이 경이로웠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실타래가 하나씩 풀린다. 문제는 돈이고 풀어내는 건 사랑이다. 아버지의 사망보험금으로 쉽게 돈 버는 법을 익힌 영호는 이를 사업화한다. 여기에 얽힌 사람들은 돈 때문에 누군가를 끌어들이고 다치게 만들고 뛰어내리게 만든다. 정희의 남편과 철식의 아내도 그 때문에 얽혔다.
우리 이렇게 해요.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건 확인해 보는 거예요. 납득이 될 때까지요.
40대 남성, A 씨로 적히는 기사 너머에 살고 있는 정희와 철식은 어떤 질문을 품고 있고 이를 확인하기 시작한다. 상대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과정 하나하나에서 느껴졌다. 정희는 계속 성훈과 대화한다. 가장 납득하기 힘들 자살 기도를 이해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느껴는 미묘한 어긋남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철식은 인위적으로 짜 맞혀진 사실을 마주하면서 좌절한다. 아내의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에 허탈해하고 좌절하지만 '아내는 토끼 고기를 먹지 않는다.' 같은 진짜가 아닌 작은 부분을 놓치지 않는다. 얽히고설켜 하나하나 따지기도 버겁지만 결국 풀어낸다.
실타래를 다 풀고 나니 정희도 철식도 이전보단 덜 아파 보인다.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걸 다 확인하고' 나니 나름의 결론을 내릴 수도 있고 이해해 볼 수도 있다. 자책, 분노, 무기력 등 어떤 감정의 단계를 거치는 것과 별개로 끝까지 확인한 뒤에야 다시 나로 돌아올 수 있다. 이야기 끝에 정희는 '손으로 눈을 가리지 않고 빛 아래서 사는 법'을 기억해 내려한다. 그 모습에 안심되었다. 큰 파도를 겪었다고 작은 시련이 아프지 않은 건 아니기에 정희의 남은 삶이 부디 평안하길 바라며 책을 덮었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와 나와 내 주변 사람들, 비슷하거나 비슷하지 않은 사람들의 삶에 너무 힘든 고난이 찾아오지 않길, 혼자가 아니길 바랐다.
끊임없이 그녀를 덮쳐 오는 사나운 인생의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그녀는 스스로를 공양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제대로 알고 싶었다. 성훈이 왜, 어떻게 죽은 건지 제대로 이해하고 납득해야 할 것 같았다. 아니, 그래야 했다.
그는 이제 살아 있지 않다. 그러니까, 더 이상 뭔가를 이해할 필요도, 누구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출처:《가장 나쁜 일》, 김보현,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