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여행

by 다정

결혼을 하고 나서야 언니랑 시간을 내어 노는 날이 더 많아진 것 같다. 이번에 9월에도 아무런 이유 없이 언니와 둘이 양산 원동으로 놀러 갔다 왔다. 원동에는 촌캉스를 컨셉으로 한 숙소들이 있었고 언니와 나의 이번 여행의 컨셉이 '아무것도 안 하는'이라 꼭 맞았다. 틈틈이 언니랑 뭘 먹을지에 대해 이야기는 나눴지만 뭘 할지에 대한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다. 그냥 구경하고 걷고 쉬다가 올 예정이었다. 컨셉에 맞게 여행 준비도 간단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여행을 가기 하루 전까지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준비할 여력이 없었다는 게 더 말이 되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12시 반 기차를 타기 위해 11시에 부산역 앞에서 만났다. 서로의 배고픔 정도를 가늠하고 어디를 갈지 정했다. 언니는 식사류를 알아봤고 나는 빵집, 카페 위주로 알아봤는데 배가 덜 고파서 에그타르트를 파는 카페로 결정했다. 에그타르트를 파는 집은 부산역에서 조금 걸어 계단도 올라야 하는데 고생 끝에 낙이 있다고 계단 끝에 있는 작고 귀여운 카페는 바깥 인테리어부터 입구, 그 안까지 마음에 쏙 들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에는 나무색 책장이 있다. 책 표지가 보이게 진열된 책장과 그 위에 놓인 이름 모를 술병들을 보며 이곳의 분위기를 짐작해 봤다. 아마도 우리 집 근처였다면, 친구가 왔을 때 데려가는 나만의 작은 단골 가게가 되지 않았을까 싶은 따뜻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책장에는 가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려주는 글도 붙여져 있었다. '자유로운 항해사, 포르투갈어 번역가 에리카와 사랑으로 빵과 요리를 만드는 셰프 카르멘이 만나 리우데자네이루 설탕빵 산에서 탄생한 작은 아이디어, 주방은 작아도 사랑은 가득한 오포르투.' 소개부터 따뜻했다. 처음 가 본 공간도 의미 있는 장소로 만드는 건 그곳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포르투는 지나가는 여행자, 동네 주민들까지 모두와 의미 있는 관계를 맺는 장소라고 느껴졌다.


브라질과 포르투갈에서 가게를 꿈꿨다는 걸 알게 되자 포르투갈 음료, 브라질 음료를 안 먹을 수 없었다. 포르투갈식 라떼 갈렁과 달콤한 옥수수 우유, 트러플 치즈빵과 포르투갈 에그타르트까지 시키고 가게를 구경했다. 가게 내부는 작았지만 알찼다. 벽면 곳곳에 붙은 포스터는 직접 그린 것이고 화장실 문 앞에는 작은 책상과 '부산을 좋아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지가 있었는데 각양각색의 포스트잇으로 부산을 좋아하는 이유가 한 벽 가득 붙어 있었다. 찾아오는 사람과 어떻게든 교류하려는 모습은 늘 내 마음을 훔쳐간다. 언니는 책장에 있는 책에 관심을 가졌는데, 편히 보셔도 된다는 친절한 인사가 내 귀에도 들려왔다. 언니가 가져온 '안녕하세요'라는 그림책을 함께 봤다. 아무런 글이 없는 그림책이라 의미를 짐작하며 읽었는데 여운이 있었다. 온몸이 투명한 주인공이 보고 느낀 것으로 몸이 채워지는 걸 보면서 우리를 구성하는 건 경험들이지 공감하고, 주인공과 닮은 투명한 누군가를 만났을 때 둘은 지나치지만 심장이 빨간색으로 채워지는 걸 보면서 운명의 짝을 표현한 걸까 짐작했다. 작은 공간이지만 금방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빵과 음료도 맛있어서 먹을 때마다 감탄했다. 여행이 시작부터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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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역에서 원동역까지는 3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방 도착했다. 원동역에 내리자마자 여행을 왔구나 싶었는데, 그도 그럴게 동네가 너무 조용했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보내기에 정말 딱이었다. 한옥을 리모델링한 숙소도 작지만 쾌적해 둘이 보내기엔 딱이었다. 벽에 기대어 멍 때려도 좋고, 간간이 내리는 빗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잘 갈 것 같았다. 그런데 언니의 가방에서 레고, 카드, 살구와 메모지까지 나왔다. 메모지는 오목이나 빙고를 할지도 몰라 챙겨 왔다고 했다. 분명 아무것도 안 하는 여행이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놀거리까지 가득 챙겨 온 언니를 보면서 '역시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우리 언니가 아니지.' 싶어 웃겼다.


언니 덕분에 나야말로 아무것도 안 하는 여행이었다. 언니가 준비한 놀거리로 놀고, 언니가 저장해 둔 레시피로 요리해 먹고, 낮잠도 자고 간식도 먹고, 각자만의 시간도 가졌다. 서로의 취향을 알고, 먹는 양과 배고픈 정도도 비슷한 언니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언니와 나누는 과거는 해도 해도 재미있고 종종 발견되는 새로운 이야기는 소중하다. 현재는 바쁘고 힘들고 모르겠다는 이야기가 많지만, 이를 나누면서 버틴다. 미래는 늘 제멋대로다. 언니는 보리가 뛰어놀 수 있는 넓은 정원을 가진 집을 상상하고 우리 셋이 모여 사는 집을 꿈꾼다. 나는 언니가 디저트를 만들고 내가 운영하는 북스테이를 상상한다. 어떤 미래가 다가올지는 모르겠지만 매번 이런 상상 속에는 멋진 우리가 되어 있음에 힘을 내본다. 앞으로도 함께 아무것도 안 하거나 하고 싶은 거 다하면서 재미나게 지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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