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만
햇살은 여전히 뜨겁지만 바람은 선선한 그야말로 가을, 밀양은대학 로컬에디터학과 과제를 위해 등에 살짝 땀이 날 정도로 길 위를 걸었다. '로컬에디터학과'에서는 3달간 8회 차에 걸쳐 기사 쓰는 법, 사진 찍는 법 등을 배운다. 또, 인터뷰하고 기사를 작성해 보는 과제가 주어진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글을 쓰는 건 자신 있었지만 장소 취재는 시작부터 어려웠다. 어떤 장소를 소개해야 할지, 취재할 장소에 대한 생각이 많았다. 내가 애정하는 곳이나 인상 깊었던 곳 등 어떤 이유가 있었으면 했다.
고민하다 사무실 근처에 친절했던 식빵집으로 결정했다. 머릿속으로 입구부터 이야기를 붙이기까지 이런저런 시뮬레이션을 하고 방문한 날, 가게가 없었다. 눈에 띄는 커다란 민트색 간판이라 분명 헷갈릴 리 없는 가게인데도 찾지 못했다. 당황하며 그 도로 위의 간판을 몇 번이고 살피다 결국 가게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담한 식빵집이 고급스러운 한우전문점으로 바뀌어 있었다. 허탈함과 허망함도 잠시 오늘은 공간 취재를 마음먹은 날이라 그 자리에서 플랜 B를 만들었다.
두 번째 가게도 친절함이 인상 깊게 남은 베이커리였다. 빵을 고를 때부터 어떤 빵을 찾는지 물어보시고 이런저런 말을 건네주셨다. 갓 나온 밤식빵 하나를 고르자 "바로 먹을 거예요? 지금이 제일 맛있을 건데, 너무 좋겠다"며 포장해 주셔서 먹기 전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밤식빵 하나를 샀을 뿐인데 기분 좋은 에너지도 함께 얻었었다. 친절함이 최고라며 달린 리뷰가 분명 이 직원 분의 이야기일 것이라 확신했다. 여기서 15분 정도 걸어야 하는 가게지만, 선선한 바람에 힘입어 가보기로 결심했다. 가게 근처로 도착해 창문으로 가게를 살펴봤는데, 그 직원 분이 안 계셨다. 이 베이커리의 정체성 같은 분이었는데 출근하는 날이 아니신지 다른 분이 매대를 지키고 계셨다. 한참 망설이다 그래도 꺾이지 말자며 용기를 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어느 베이커리와 같았다. 살가운 인사도 긍정적인 에너지도 없었다. 어떻게든 말을 붙여보자고 다짐한 용기가 바람 빠지는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도저히 날이 아닌가 싶다가도 '칼을 썰었으면 무라도 베야지,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지!' 라며 스스로 어르고 달랬다. 마지막 도전으로 가보고 싶었던 근처 카페로 향했다. 꽤 오래전부터 지도에 저장해 뒀고, 격변하는 카페 거리에서 살아남은 가게니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르막 내리막을 거쳐 도착한 카페는 통창이라 내부가 시원하게 보였다. 오전 10시에 문 여는 카페가 많지 않아서 그런지, 호주식 브런치를 파는 게 유명해서 그런지 몰라도 국적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가득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렇게 바쁘신데 질문할 수 없겠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돌렸다.
등에 땀이 식었다 났다를 반복했다. 중꺽마 정신으로 들린 공간만 세 군데. 어떻게든 공간 취재를 해보려 했는데, 몇 번이나 꺾이니 이 마음을 지키는 게 어려워졌다. 이런 고군분투를 거치면서 내가 계획이 흐트러지면 어려워하는 J형 인간이구나 또 한 번 느낀다. 최근에는 이렇게 계획을 벗어나는 일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머리에서 열이 나고 진이 쏙 빠진다. 과제를 못했다는 변명이 길어졌다. 그래도 공간 취재를 한다고 마음먹은 덕분에 오랜만에 눈을 크게 뜨고 길을 걸었다. 갑자기 마음을 사로잡는 어떤 흥미를 끄는 공간을 발견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폈다. 그러면서 의미와 흔적도 혼자 더듬어 봤다. 이를 글로 옮기기엔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 앞으로도 계속 눈을 크게 뜨고 다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