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배운 것

내가 가진 에너지, 새로운 여행의 방식, 새롭게 보는 시야

by 다정

오랜만에 걱정 없이 여행길에 올랐다.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설렜다. 최근의 여행을 돌아보면 바쁜 일상 속에서 겨우 숨 쉴 구멍이 되었던 하루들이었다. 하고 있는 일과 해야 하는 크고 작은 일들을 해나가다 보니 여행도 그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할 일을 모두 끝내고 원하는 대로 하루를 꾸릴 수 있는, 비어있는 상태였다. 해방감이라는 낯선 여유 덕분에 단순히 더운 나라로 떠나는 여행, 아버지의 환갑을 기념하는 여행이라기보다 올해 수고한 나에게 주는 선물 같은 여행처럼 느껴졌다.


꽉 찬 3박 5일, 여행하는 매일 5시 반(한국시간으로 7시 반)에 눈이 떠졌다. 심지어 평소보다 더 늦게 잠이 들었는데도 거짓말처럼 5시 반에 눈이 떠졌다. 잠이 많아서 늘 성장기라고 말하는 사람이라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의아하고 궁금했다. 납득할만한 만족스러운 이유를 찾아 계속 질문했다. 그 끝에 찾은 답은 '선택과 집중'이다. 에너지 양은 어제도 오늘도 같은데, 여행지에 와서 택하고 고민하는 에너지가 덜 쓰였다. 한국에서는 눈뜨자마자 오늘 하루 할 일을 점검하고, 점심에 무엇을 먹을지, 놓친 일은 없는지 등 크고 작은 선택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결정하고 행동하기 전까지 이 선택들이 최선일지 '만약에' 가정이 핑퐁 거 린다. 그런데 여행지에서는 머릿속에 떠오른 일을 그냥 하면 된다. 하고 싶은 걸 하고, 먹고 싶은 걸 먹으니 하루를 꾸려가는 데 고민할 게 없었다. 고민하고 선택하는 에너지가 아껴지니 일찍 일어나고 많이 걸어도 덜 피곤한 거 아닐까 싶었다. 역시 하고 싶은 일이나 해야 하는 일은 고민하지 말고 하는 게 낫다. 내 것 같았던 문장이 새삼 새롭게 느껴진다.


또 하나, 생각 없이 고민 없이 하는 루틴이 중요한 것 같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생각 없이 양치하는 것처럼 고민 없이 출근하고 고민 없이 운동하고 고민 없이 밥을 챙겨 먹어야겠다. 내가 생각보다 에너지 있는 사람이라는 걸 비행기를 타고 4시간이나 날아와서 깨달았다.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한참을 수영하고도 에너지가 남았다는 이 감각을 소중히 간직해야겠다. 내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유용한 일에 더 소중하게 써야겠다. 도파민이나 자극이 아니라 사고하는데 쓰고 싶다. 일상이 정해진 루틴 속에서 재미없어질 때 어떤 재미난 일이 일어날지 궁금하다.




여행하는 방식이 또 한 번 크게 바뀌었구나 느꼈다. 10년 전 프랑스에서 스마트폰 위 파란 점으로 느꼈던 새로운 감각을 이번 여행에서도 비슷하게 느꼈다. 처음인 나라, 낯선 길 위에서 지도를 켜면 내가 어디 있는지 밝은 파란 점으로 알려줬다. 길을 헤매다 꿈처럼 멋진 장소를 발견하는 낭만은 줄었지만, 미아가 되는 불안도 줄었으니 좋은 걸까 하고 잠시 고민했다. 이번 여행에서는 궁금할 때마다 30초면 답을 알 수 있었다.


처음 방문하는 나트랑은 모든 게 신기했다. 신호등 없이도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교통 상황, 거리에 꽤 많은 민트색 자동차, 베트남 국기 아닌 빨간 깃발까지. 이번 여행에서 달라진 건 마음의 여유뿐만 아니라 궁금증을 바로 해결할 수 있는 AI가 있다는 거다. 궁금한 질문이 생길 때마다 '이건 왜 이런 거야?'를 물어봤다. 오토바이가 교통 흐름을 주도하기 때문에 차도 저속으로 달리고, 또 클락션으로 서로 존재를 알리다 보니 신호등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다닐 수 있다. 민트색 차량은 베트남 사람들의 개성이라기보단 베트남 택시 회사 색깔이었다. 빨간 깃발은 구소련 국기인데, 나트랑이 예전부터 러시아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휴양지이기 때문에 장식처럼 많이 쓴다. 예전에는 짐작만 하고 넘어갔을 풍경에 대해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이 여행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여행지에서 느끼는 낯선 문화, 다른 풍경에 대해 맘껏 상상하며 이야기를 만드는 재미가 줄었지만 오히려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으니 이것도 좋아진 걸까.


마지막으로 여행지에서 일상으로 돌아오니 모든 게 새롭게 느껴진다. 간판부터 도로, 단풍과 사람들까지.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긴 것들에 대해 새로 배우는 사람처럼 보게 된다. 은행의 노란 잎이 새삼스럽고, 집 근처 건물 벽면을 처음 제대로 보고, 빛바래진 간판에 적힌 내용도 새롭다. 여행은 잠깐 떠났다 돌아오는 거지만, 일상을 여행처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금방 익숙해지겠지만 일상을 새롭고 아름답게 느끼는 이 감각도 잘 기억해 종종 꺼내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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