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장이 소설 속에 있다면 나는 이 인물이 가출 청소년이라고 쉽게 생각할 것 같다. 집이라고 하면 터전이자 돌아올 곳, 편안하고 안락한 둥지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그런 공간을 나오게 되는 데에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해하며 소설을 읽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장의 주인공은 나다. 나는 가출청소년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집을 나왔다.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여행을 뺀다면 설명하기 힘든 일이고 잘 일어나지 않는 일이지만 그래도 종종 반복하는 행동이다. 나올 때마다 느낀다. 집 나오면 개고생이다. 돌아가면 또 느낀다. 역시 우리 집이 최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생을 나는 사서 한다.
이번 가출은 '안식주'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였다. 안식년이나 안식월을 가지기에는 시기상조인 것 같지만 쉬고 싶다는 욕망에 에너지를 충전하겠다는 거창한 이유를 앞세워 집을 나왔다. 사실 집에서도 쉴 수 있지 않나?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구체적으로 상상해보면 불가능한 일이다. 계획형 인간은 쉬는 것도 계획을 세워야 하기 때문에 집에서 쉬는 것은 스스로를 고문하는 행동과 마찬가지이다. 하루나 이틀 정도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낮잠을 자겠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분명히 할 일을 찾을 것이고 쉬었다고 괴로워할 것이 뻔히 보인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집을 나와서 잘 쉬고 있느냐 물어보면 그렇지도 않다. 안식이라는 단어의 뜻이 '편하게 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안식주라고 이름 붙인 이 한 주에도 커다란 목표와 사소한 계획들로 가득 차있다. 쉬어야 하니까 스마트폰은 멀리 두고, 아침에는 요가를 하는 습관을 다시 만들고, 음식은 비건을 지향하며 직접 만들어 먹고, 이 시간 또한 지나갈 것을 알기에 기록으로 남겨두는! 사소한 계획으로 빡빡하다. 그리고 올해 커다란 목표 중 하나인 '출판하기'를 위해 브레인스토밍을 하고 책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그려놓는 것이 안식 주 중의 커다란 목표이다.
이 많은 사소한 계획과 커다란 목표가 톱니바퀴처럼 딱 맞게 나를 굴리고 있어서 편하게 쉰다는 건 모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와는 다른 환경에서 눈을 뜨고 낯선 것들을 시도해보며 24시간을 오롯하게 내가 가꾸어 나간다는 점이 가출의 매력적인 부분이다. 이번에는 끼니를 직접 만들어 먹겠다는 사소한 계획이 있어 돌아서고 나면 다음 끼니를 걱정하게 되지만 그것 또한 나의 몫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갑갑하게 막혀있는 무언가가 뻥하고 뚫리게 되진 않을까 기대를 해본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나는 고생을 사서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