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우리 집 저녁은 아주 조용하다. 8시가 되면 104번부터 그 언저리에 있는 중화 드라마를 요일 별로 챙겨보는 아버지와 10시가 되기 전에 잘 준비를 하는 나, 스케줄 근무를 해서 어느 때에는 그 누구보다 일찍 혹은 그 누구보다 늦게 잠을 자는 언니, 10시에 퇴근하면 운동을 하고 집에 오는 동생까지. 쉽게 시끄러워질 이유도 없다. 그런데 요즘에는 평상시와는 다르게 조용함과 긴장감이 섞인 저녁을 종종 보내곤 한다.
3X4로 정렬된 카드 그 옆에 있는 5개의 보석 그리고 그 위를 오가는 손, 그보다 빠르게 돌아가는 눈동자까지. 영화에서나 봤던 장면이 자주 연출된다. '스플랜더'가 우리 집에 온 직후에는 거의 매일, 셋넷 아니면 둘이라도 게임을 펼쳤다. 스플랜더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1점부터 5점까지 적힌 카드를 보석 토큰을 주고 구입하여 15점을 모으면 끝나는 게임이다. 카드는 여섯 개의 보석 토큰을 조합하여 살 수 있다. 15점, 이 점수를 모은다는 단순한 목표와 숫자만 잘 보면 되는 간단한 게임이기 때문에 쉽게 할 수 있는 전략 게임이다.
나는 스플랜더에 꽤나 자신이 있었다. 남자 친구랑 보드게임방을 자주 가는 데 갈 때마다 했고 그러다가 직접 구입해서 만날 때마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생도 본인이 군대에서 엄청나게 많이 했던 게임이라고 자신만만해했다. 처음에는 '이겨버려야지!' 하며 승부욕에 불탔었는데 동생은 내가 하는 게임의 방식을 깨부수고 이겨버렸다. 어안이 벙벙했다. 점점 동생이 이기는 게 너무 당연해질 정도로 많이 졌다. 하지만 필승전략이 없는 게임이고 어느 정도 운도 따라줘야 하기 때문에 동생이 매번 1등을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매번 모두가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시작했고 그러니 이 게임에 더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다들 열심히 하니까 이겼을 때의 쾌감은 더 컸다. 모였다 하면 자리를 폈다. 서로의 전략을 비난하기도 하고, 일부러 상대가 눈독 들이고 있는 카드를 가져오면서 유치해지기도 했다. 3등과 4등은 '추운 밤에 보리랑 산책 갔다 오기'를 내기로 걸기도 하면서 모두의 눈에 불이 난 적도 있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 승부욕이 있어 어느 순간 보면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아있다. 그러면 이 플라스틱 토큰을 모으고 카드를 사는 이 게임에 이렇게 진지할 일인가 하며 웃음이 터지기도 한다.
요즘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고 다 함께 '처음'하는 것들이 많아서 행복하지만 보드게임을 같이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명절도 아니고 윷놀이도 아니고 보드게임을 가족들이랑 같이 하다니, 늘 친구들과 했던 게임이어서 상황은 낯설고 신기하지만 그래도 승부욕은 불타오른다. 단순한 게임이었지만 다 같이 하나에 몰입하고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었고 또 다른 게임은 뭐가 있을까 찾게 되기도 했다. 다음번에는 동생이 재밌다고 하는 '뱅'이라는 보드게임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