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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규석 마샹스Machance Apr 09. 2017

100년 전 광주를 찾아온 광주의 어머니 서서평-쉐핑!

천천히 평온하게ㅡ엘리자베스 쉐핑

광주 양림동, 해발 108m 양림산 주변은 100년 전 외국에서 온 선교사들의 터전이었다. 선교사들의 흔적이 잘 보존 되어있어서 근대문화유산을 찾아볼 수 있는 유적지가 많이 있다.

태어날 때는 한국인이 아니었으나 죽을 때는 한국인이었던 사람.

식민치하, 가부장적인 사회, 가난과 배고픔에 더하여 병마에 시달리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살았던 고난의 시기에 광주를 보살폈던 광주시민이고자 했던 서서평은 누구인가?

나는 오늘 100년 전 광주와의 인연을 시작하여 광주의 어머니가 된 광주의 시민 서서평을 알아보고자 한다.

서서평과 광주와의 인연은 의료선교사로 서서평이 1917년 광주선교부에 부임하면서 부터였다. 1918년 잠시 군산선교부로 갔다가 이듬해인 1919년 다시 광주선교부로 돌아온 이래로 돌아가실 때까지 광주에 계속해서 머물렀다. 22년 우리나라 생활 중 대부분이라 할 수 있는 약 17년을 광주의 사람들을 보살피며 살았을 만큼 광주와의 인연은 깊다. 서서평의 장례식은 12일 장으로 오웬 기념관에서 1934년 7월 7일에 치러졌다. 광주 최초의 사회장(社會葬)이었으며 시민 전체가 슬픔에 젖은 체 광주의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냈다. 가장 가난한 거리의 걸인, 손가락질 받던 한센인(나환우)부터 고위 관료들까지 모두가 그녀를 어머니라 부르며 눈물로 떠나가는 길을 적셨다.

<서서평의 묘역은 호남신학대학교 내의 선교사 묘역에 있다>

<선교사 묘역으로 가는 길에 있는 서서평(쉐핑)에 대한 안내문-쉐핑길에 있다>


나는 오늘 1934년 7월 7일 광주시민의 품을 떠나 서서평(엘리자베스 J 쉐핑)이 영면을 하고 있는 곳을 찾아 나섰다.

선교사 묘역을 찾은 날, 양지 녘엔 4월답게 따뜻한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광주광역시 남구 제중로77(양림동)의 호남신학대학교 정문을 들어서서 길을 따라 걸으면  정면에 음악관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길은 본관과 운동장으로 가는 오른쪽 길과 기숙사와 도서관으로 가는 왼쪽 길로 나뉜다. 왼쪽 길로 기숙사를 지나 도서관으로 가는 길을 따라 걸으면 오른편에 작은 동산으로 오르는 계단 길이 나오는데 이 길의 이름은 카팅톤 길이다. 나무 발판으로 된 계단 길에는 작년 가을에 떨어진 낙엽이 아직 그대로 이다.

팅톤 길을 따라 오르는 오른 쪽 풀밭에는 금빛 수선화가 줄지어 피었다. 올해 들어 처음 본 수선화라 반가웠다. 오르던 길을 멈추고 계단에 앉‘안녕?’하고 인사하는 내게 수선화는 말없이 그저 고개만 갸웃거린다. 물가도 아닌 언덕 위 계단 옆에서 애타게 연못을 찾고 있는 수선화! 물 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따라 연못 속으로 가버린 Narcissus처럼……. 말 없는 수선화를 대신해 계단을 지나 흐르던 바람이 Wordsworth의 시 수선화를 읊었다.

『골짜기와 산 위에 높이 떠도는 구름처럼 외로이 헤매 다니다

나는 문득 떼 지어 활짝 피어 있는 황금빛 수선화를 보았다.

호숫가 줄지어 늘어 선 나무 아래 미풍에 한들한들 춤을 추는 수선화.


은하수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별처럼 총총히 연달아 늘어서서

수선화는 샛강 기슭 가장자리에 끝없이 줄지어 서 있었다.

흥겨워 춤추는 꽃송이들은 천 송인지 만 송인지 끝이 없었다.


그 옆에서 물살이 춤을 추지만 수선화보다야 나을 수 없어

이토록 즐거운 무리에 어울릴 때 시인의 유쾌함은 더해져

나는 그저 바라보고 또 바라볼 뿐 내가 정말 얻은 것을 알지 못했다.


하염없이 있거나 시름에 잠겨 나 홀로 자리에 누워 있을 때

내 마음 속에 그 모습 떠오르니, 이는 바로 고독의 축복이리라.

그럴 때면 내 마음은 기쁨에 가득 차 수선화와 더불어 춤을 춘다.』

팅톤 길이 끝나는 곳에서 프레스톤 길이 시작되고 고난의 길이 이어진다.

고난의 길은 65개의 커다란 사각형의 디딤돌로 구성되어 있다. 디딤돌 하나하나마다 선교의 이름과 태어나고 죽은 년도가 새겨져 있다. 그들의 이름이 내 발자국으로 닳아 지워질까 두려워 디딤돌의 귀퉁이만 밟고 걸었다.

디딤돌이 시작되는 초입의 오른쪽에는 홈으로 길게 파여진 십자가가 나오고, 십자가 사이로 들어서면 비로소 선교사 묘역 안으로 들어가는 자갈길이 나온다.

<서서평의 이름이 새겨진 디딤돌>

<서서평  무덤가 처연하게 핀 붉은  동백>

아! 이번엔 동백꽃이다. 겨울에도 푸르던 동백나무에는 빨갛게 동백꽃이 수더분하게 피었다. 동백꽃을 보니 어머니 생각이 났다. 동백기름을 바르고 참빗으로 머리를 빗어 올리신 고운 어머니의 모습이 그립다. 내 마음에서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의 눈물이 뚝 떨어졌다. 내 마음을 아는 듯 동백꽃도 풀숲에 통째로 뚝 떨어져 있다. 진 꽃마저 아름다운 동백꽃이 어머니의 모습이다. 선교사의 묘비 위에 몇 송이 동백꽃이 올려져있다. 올려 진 동백 꽃송이는 누군가의 손길에 의한 것일까? 아니면 바람의 손길이었을까?

선교사의 묘는 우리나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반원형으로 봉긋하게 솟아 있는 모양이 아니다. 묘비만 덩그러니 놓인 경우도 있고, 긴 직사각형 틀 안에 자갈이 깔려 있는 묘와 묘비가 함께 있기도 하다. 탑 모양으로 된 것도 있다. 선교사 묘역 중 다섯 번째가 서서평의 묘이다. 서서평의 묘비를 쉽게 찾을 수는 없었다. 묘역 안내도가 있는 곳으로 들어서지 않은 까닭에 묘비 하나하나를 일일이 읽어 보아야 했는데, 길에서 보이는 묘비 아무런 글자도 새겨져 있지 않기 때문다. 앞면에는 아무 것도 기록되지 않았으나 뒷면에는 Elizabeth J. Shepping, Born Sep 26. 1880, Died June 26. 1934, 서서평, 광주금정교회 건립이라 새겨져 있었다.

보리밥에 된장국, 고무신에 검정통치마를 입고 한국여인보다 더 한국 여성으로, 평신도로, 간호사로 22년의 세월을 우리나라 사람을 위해 헌신하며 살았던 사 서서평!

눈을 감고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100년 전 광주 시민을 따듯하게 보듬어 안았던 광주의 어머니 서서평이 평안하게 영면하기를 빈 후에 동백 꽃 한 송이를 묘비 위에 올렸다.

<한일장신대에서 꽃바구니를 놓아 두었다.-서서평은 한장신대 설립자이다.>

<5번이 서서평의 영어 이름이다>


의향 광주!

예로부터 내려온 광주의 의로움은 진정한 광주 시민이었던 서서평을 거치면서 더 깊고 넓어졌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가 그렇고, 광주 학생독립운동으로 일제의 압제에 항거하였으며, 불의의 독재에 항거하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그렇다. 어려울 때마다 주먹밥을 나누고 피를 나누며, 아픔을 함께 겪으면서, 광주를, 우리나라를 자유민주주의로 이끌고 있는 광주의 정신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2017년 4월~5월은 국정을 농단했던 대통령이 탄핵되므로 인해 당초보다 빨라진 대통령 선출을 위한 기간이다. 대통령 후보로 나선 이들은 저마다 자신이 대한민국의 발전과 자유를 위한 적임자라고 한다. 그러나 광주는 그대들에게 말한다. 광주에 와서 보고 들으라고, 서서평의 침대 맡에 걸려 있던 좌우명 -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NOT SUCCESS, BUT SERVICE)를 되새겨보라고…….

<중앙에 게시된 서서평의 사진>

<서서평의 길>


지금의 글부터는 서서평의 일생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서서평에 대해 알기를 바라며 덧붙다.

서서평이 태어나 자란 곳은 독일이었다. 서서평이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돈을 벌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다. 할머니의 슬하에서 자라던 서서평은 할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어머니가 있는 미국으로 떠난다. 미국에서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사로 근무하다가 1912년 3월, 서서평의 나이 32세 되던 해에 미국남장로회 소속 의료선교사로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코리아 마루(S.S.Korea)호를 타고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다. 우리나라에 도착해서는 1912년 3월 중순 목포선교부에 소속되었다가 1916년 군산선교부, 1917년 광주선교부, 1918년 군산선교부, 1919년 광주선교부로 이동을 하였다.

우리나라에 오기 전 까지 서서평의 이름은 Elizabeth Johanna Shepping이다. 우리나라 이름 서서평은 천천히 평온하게라는 뜻을 지녔다. 이름을 지을 당시 서서평은 자신의 급한 성격을 고쳐 매사를 서서히 하겠다는 의미와 모난 성격을 평평하게 한다는 의미를 더하여 이름을 지었다. 이를 받아 사람들은 우리나라 이름 서서평을 한자로 徐徐平(천천할 서徐, 평평할 평平) 또는 徐舒平(펼 서舒)으로 적는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으로 살고자 노력하며 우리나라 이름까지 지었던 서서평의 정신을 생각한다면 굳이 한자로 표기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1905년 11월 20일 미국남장로교 의료선교사 놀란(Dr. J. W. Nolan)이 자신이 사택으로 사용하던 작은 기와집에 진료소를 열고 광주지역에서 현대의료를 개시한 광주 제중원에서 서서평은 간호사로 근무하였다. 광주 제중원은 서서평이 우리나라에 오게 된 동기이기도 하다. 국운이 다해 쓰러져가는 조선 말, 양반과 상민, 천민으로 나뉜 계층적 ,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남존여비의 가부장적 사회문화에서 여자는 항상 약자였고 무시를 당하는 대상이었다. 1908년 제중원의 2대 원장으로 부임한 윌슨은 우리나라 여성들의 열악한 삶을 안타까이 여기며 병원에 간호사가 절실하다고 미국 선교본부에 요청을 하였고, 이로 인해 서서평이 한국에 오게 된 것이다.(제중병원은1970년 현재의 광주 기독병원(광주 양림로37)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16년 현황은 허가병상 578, 진료과목 29개과, 직원 800여 명으로 광주의 대형 종합병원 중 하나다.)

<제중원의 2대 원장 윌슨(우일선) 선교사 사택- 윌슨은 미국에 간호사 파견을 요청하였고 그 결과로 서서평이 오게되었다.>

<기독병원 구 건물 뒷쪽>

<기독병원 1층 로비에는 역사관이 있다. 역사관 내부에 년도별로 전시된 사진들>

<윗 줄 사진 중앙에 서서평의 사진이 있다>


서서평은 제중원을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와 제주도를 끊임없이 순회하며 아픈 사람들을 돌보고 가난한 여인들을 가르쳤다. 버려진 아이들의 양모로써 13명의 수양딸과 1명의 한센인(나환우) 아들을 입양하여 공부를 하게하고, 좋은 곳으로 시집가도록 도우며 사랑으로 보살폈다. 또한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의 곁에 항상 머물렀다.

여성의 권익 신장에도 앞장섰는데, 1922년에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부인조력회(여신도회)를 조직하여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성미제도를 마련하였다.

여성교육을 위해 서서평은 1922.6.2일에 광주에 여성들을 위한 전도부인(Bible Woman) 양성학교를 세우면서 자신의 미국 친구인 로이스 니일(Lois Neel)의 원조를 받아 친구의 이름을 딴 우리나라 최초 여성 신학교인 이일성경학교(1961.4.1 전주 한예정신학원과 합병하면서 전주 한일여자신학교로 변경, 1998.9 한일장신대학교로 변경, 전라북도 완주군 상관면 왜목로 726-15)를 양림동에 설립하였다.

또한 1923.4월 조선간호부회를 결성하고 1923.5.12 조선간호부회(현 대한간호협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으로 추대되었다. 회장으로 일하는 10년 동안 간호교육을 위한 실용간호학 교과서를 번역하는데도 힘을 썼다. 한글 사용이 금지 된 일제하에서도 간호부협회의 소식지와 서적들은 한글을 사용하였다. 서서평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개최 된 1929년 7월 국제간호협의회(ICN)에 가입신청을 하고 총회에 참석한다. 조선간호부회가 ICN의 독립 회원국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연설을 하며 조선간호부회를 일본과 별도로 세계 간호사협회에 등록하려 노력하였으나, 일본의 방해와 ICN의 1국가 1단체 가입 원칙으로 무산되었다. 서서평의 꿈은 제자에 의해 1949년 6월 조선간호부협회가 국제간호협회 정식회원국이 됨으로써 이루어졌다.

일제 강압통치 아래 있던 우리나라에서 서서평이 독립지사들과 자유로이 왕래하며 돕는 것을 일제총독부는 못마땅하게 여다. 결국 서서평은 일제총독부의 압력으로 세브란스를 떠나 1919년에 다시 광주 제중원으로 돌아오게 된다. 서서평은 이후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이 탈출해 나 온 출애굽기를 가르치며 우리나라의 독립을 확신시키고 전파하는데 노력하였다.

소록도 한센병환자 요양시설과 병원의 시작에도 서서평이 관여되어 있다. 서서평이 근무하던 광주 제중원은 1912년부터 영국 '극동과 인도구라협회'의 지원으로 한센인(나환우)을 위한 E자형 거주지(광주나병원)를 건축하고 본격적으로 진료하고 있었다. 서서평 역시 제중원에서 다른 사람들이 회피하기만하는 나병환자에게 더 많은 정성을 쏟았으며, 길에서 여성 한센인(나환우)을 만나면 자신의 집에 데려가 목욕을 시키고 자신의 옷을 입혔다. 정작 자신이 입을 옷은 두 벌을 넘지 못한데도... 1933년, 서서평은 일제 총독부가 한센인(나환우)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 강제 거세를 하는 등의 정책에 항의하였다. 한센인(나환우)들이 살 수 있는 터전을 요구하기 위해 조선인 목회자 등과 함께 50여명의 한센인(나환우)을 이끌고 서울에 있는 총독부로 행진을 하였다. 전국에서 한센인(나환우)들이 행진에 동참하게 되어 총독부에 이를 때쯤 530명이 넘었다. 결국 조선총독부는 소록도에 시설과 병원을 마련하게 된다.

서서평은 1921년 백운동교회의 전신인 진다리 교회와 봉선리 교회를 세워 기독교의 평등사상을 전파하였다.

서서평의 마지막 삶마저 우리에게 눈물의 감동을 안긴다. 서서평은 죽음에 앞서 자신의 시신이 조선의 의학발전을 위해 제중병원에 쓰이기를 바랐다. 1934년 6월 26일 새벽 4시에 54세를 일기로 희생과 봉사의 일생을 마감하였다. 사인은 영양실조로, 자신이 먹어야 할 것조차 줄여 배고픈 사람들에게 주느라 정작 본인은 제대로 먹지 못하여 영양이 부족했던 것이다. 죽으며 남긴 것은 옥수수가루 두 홉, 일주일 노동자 품삯 7전과 반쪽짜리 담요가 전부였다. 담요가 반쪽인 것은 추운 겨울에 거리에서 떨고 있는 문둥병환자에게 하나 밖에 없는 자신의 담요를 반으로 잘라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안락함과 편안함을 추구하기보다는 주위에 있는 춥고 배고프며 아픈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고 실천에 옮기는 삶이었다.

ㅡㅡㅡㅡㅡ

서서평의 삶은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감독 홍주연·홍연정)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14회 서울국제사랑영화제에서  4.20일부터 6일간  상영될 예정이다.

<서서평의 장례식이 광주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뤄졌던 오웬각-양림교회 내에 있다.>

<광주 기독간호대학교 기숙사로 사용되고 있는 서서평(쉐핑) 홀>

<호남신학대 선교자 묘역에 있는 개신교 신자  순교 기념비>

<선교사 묘역을 둘러싼 낮은 돌담>

<벤취 하나도 멋있다. 가을엔  앉아서 사색해야 할 것을 느끼게 하는 벤취!>

<호랑가시나무의 붉은 열매는 크리스마스 때 장식용으로 쓰이며, 교회에서는 귀하게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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