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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규석 마샹스Machance Feb 04. 2018

평화를 빕니다.

매주 미사 때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있다. 바로 “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라는 신부 말씀에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360도로 돌면서 “평화를 빕니다.”라고 교우들과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다. 내 곁에는 늘 아내가 앉아 있기에 일주일에 한 번은 아내를 향해 “평화를 빕니다.”라고 인사를 하게 된다. 나 역시 아내에게서 “평화를 빕니다.”라는 인사를 받는다. 평화의 인사가 좋은 것은 미사 전에 설혹 아내와 다툼이 있었더라도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고개를 숙이며 “평화를 빕니다.”라고 인사를 하고 나면 마음이 풀린다. 그러니 평화의 인사는 우리 부부 관계를 원만하게 이어주는 끈인 셈이다.

곁에 앉은 아내뿐만 아니다. 앞뒤 양옆으로 눈을 마주치는 모든 교우들에게 서로 평화를 빈다고 인사를 하니 얼마나 좋은가! 어느 누가 내게 평화를 빌어주겠는가? 뉘라서 내 인사를 받아주겠는가? 길을 가다가 마주치는 낯선 사람에게 “평화를 빕니다.”라고 인사를 하면 상대가 얼마나 뜬금없어하겠는가. ‘미친 사람 아닌가? 생각하기도 할 거고, 자신이 아닌 뒷사람에게 한 것이려니 하고 뒤를 돌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미사 시간에 나누는 평화의 인사는 교우들의 진심까지 담겨있는 인사다. 일주일을 마감하고 또 다른 새로운 일주일을 준비하는 날에, 여러 사람에게서 평화의 인사를 받고, 나 또한 평화를 빌어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매주 평화롭게 시작하여 평화롭게 마치니, 매사 두려움이 없고, 술술 잘 풀려나간다. 그야말로 평화로운 일상이 되는 것이다.

나는 평화의 인사를 성당 밖에서도 잘 사용한다. 회사일로 고객사를 방문하고 일을 마친 후 고객사에서 나올 때 고객을 향한 내 인사는 영락없이 “평화를 빕니다.”이다. 거의 모든 고객이 나를 따라서 덩달아 나에게 평화를 빌어준다. 회사에서 내가 방문한 고객에게 만족도를 조사하면 늘 ‘매우 만족’이다. 고객 본인의 입으로 내 평화를 빌어주었는데 만족도 조사에서 ‘불만족한다.’고 말해야 하는 모순된 상태에 고객을 빠트릴 수는 없기에 나는 늘 최선을 다한다. 나 스스로 고객사의 일을 대충 해주고 나오며 가벼운 마음으로 “평화를 빕니다.”라고 인사를 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객은 나 보다 내가 한 일에 대해 더 잘 안다. 내가 건성건성 대충 해 놓은 일에 마음을 부글부글 끓이면서 내 인사를 따라 평화를 빈다고 할리가 만무하다. 회사에 불만을 터뜨리고 때로는 욕까지 하는 고객사를 방문해야 할 일이 생기면 회사에서는 어김없이 나를 찾는다. 그때마다 나는 내가 하는 “평화를 빕니다.”라는 인사가 고질적인 민원을 해소해 주는 정답임을 알기에 즐겨 고객사를 찾는다.

평화의 인사로 친해진 수녀님이 계시다. 회사일로 수녀원에 가야 할 일이 있었는데, 일을 마치고 나오면서 “평화를 빕니다.”라고 인사를 드렸더니, 수녀님이 가는 나를 다시 붙잡아 앉히고는 “세례명이 뭐예요?” 물으시더니, 차 한 잔을 더 내어 주시며 수고했다고 고맙다고 하셨다. 그 뒤론 내가 근무하는 회사에 볼 일이 있을 때면 항상 나만 찾으며 기다리신다. 회사에서도 성당이나 수녀원에 관계된 일은 나에게만 연락을 한다. 수녀원에 가면 수녀님이 원했던 일을 마치고 추가로 더 할 일이 없는지 찾아본다. 수녀님께서 하시기에 힘든 일이 밀려 있는 경우를 봐왔기 때문이다. 스스로 찾은 일을 해도 되는지 의사를 묻고 그 일까지 하고 나면 즐거워진다. 행복한 마음으로 “일 다 마쳤습니다. 이제 가 보겠습니다. 평화를 빕니다.”하고 인사를 하면 수녀님께서는 나보다 더 큰 목소리로 평화를 빈다고 미소까지 담아 인사를 해주신다.

우리나라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인사말 “안녕하십니까?”는 아무 탈 없이 편함을 뜻하는 ‘안녕(安寧)’이라는 한자어에 상태를 묻는 ‘하십니까?’라는 의문문이 이어진 말이다. 우리나라가 생긴 이후  현재까지 역사를 살펴보면 셀 수없을 만큼 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아 온 우리나라 사람들이 ‘밤사이에 별 일은 없었는지?’ 묻는 슬픈 역사가 담긴 인사말이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별일이 없는지 묻는 인사보다 평화를 빌어주는 인사 “평화를 빕니다.”라고 인사하는 것이 훨씬 더 좋지 않을까? ‘안녕하냐?’고 과거의 상태를 묻는 것보다 현재부터 미래까지 평화롭기를 기원해주는 인사가 훨씬 더 발전적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요즘 종교와 상관없이 만나서 인사를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빕니다.”라고 인사를 한다. 천주교 교우들끼리만 평화를 빌어주는 것보다는 사회 공동체를 이루고 함께 사는 모두가 서로의 평화를 빌어준다면, 그래서 평화로운 사회가 된다면 백번이라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 평화를 빌어주는 인사의 진정한 가치는 “평화를 빕니다.”라고 인사를 하는 당사자가 가장 큰 혜택을 받는 데 있다. 나 자신이 평화로운 상태가 아닌데 어찌 다른 사람의 평화를 빌어줄 수 있겠는가? 평화를 빌어주고 나면 우선 나부터 평화로워진다. 그러니 어찌 아니 “평화를 빕니다.”라고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평화를 빕니다.”라는 인사는 예수님을 향한 내 믿음의 인사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호수를 건너갈 때 돌풍이 몰아쳐 풍랑이 일고 배에 물이 차게 되자 제자들은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깨어나시어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곧 잠잠해지며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느냐?” 하셨다.』(루카8.22-25) 그렇다. 내 입을 통해서 “평화를 빕니다.”라고 하는 인사는 예수님께서 반드시 평화롭게 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의 신앙고백이다.

또 “평화를 빕니다.”라는 인사는 내 짐을 더는 말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매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오 11.28)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믿고 내 마음에 있는 모든 짐을 예수님께 맡기고 의지한다. ‘주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는 마음으로 사니 여유롭고 자유롭다. 이러한 나의 마음을 담아 “평화를 빕니다.”하고 인사를 한다. 짐을 훌훌 털고 자유롭게 사는 삶이 어찌 아니 평화로울 수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날마다 평화로운 이유다.     

합장하며 “이 글 읽으신 모든 분들께, 평화를 빕니다.”     

정규석 유스띠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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