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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규석 마샹스Machance Mar 15. 2018

선 하나 긋기

하얀 종이 위에 연필을 들어 의미 없이 선을 주욱 그었다. 선은 종이 끝까지 가지도 못하고 멈췄다. 반듯하게 그은다고 그은 선이다.

종이를 눈 가까이 들고 찬찬히 보니 선이 울퉁불퉁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된 선인 줄 알았는데, 중간중간 끊어져 있기도 했다.


하얀 종이 위에 그어진 선을 보며 인생을 생각한다.

돌아보면 종이 위에 그어진 선처럼 크게  굴곡지지도 않고 평탄한 삶이었다. 태어난 이래 지금까지 계속해서 살아왔으나, 점점이 추억으로 이어졌을 뿐, 살아온 날 모두를 기억할 수는 없다.

그래도 총체적으로 둘러보면 어려서는 부모님의 각별하신 보살핌으로 편안하고 행복했다. 젊어서는 친구들 도움으로 즐거웠다. 나이 들어가면서 아내의 사랑으로 다시 행복하다. 나를 바라보는 아들의 눈망울을 보면서 용기를 얻는다.


다시 선으로 돌아왔다.

선을 자세히 보니 점점이 끊어질 듯 이어진 모양새가 신비롭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더니 내가 그은 선이 예쁘다. 어느 날엔가는 세상에 선긋기를 마쳐야 할 것이다. 예고도 없이 불현듯 해야 할 일이 생각난 듯 연필을 놓아버릴 것이다.

오늘 아침, 눈을 뜨며 내게 또 하루가 주어졌음에 감사했다. 집을 나서면 또 삶을 위한 경쟁을 해야 한다. 그러다 문뜩, 오늘 하루는 나 자신 말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하루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필 쥔 손에 힘이 없어 연필을 놓을 때까지 나만 위해 선을 긋는다면 그 선은 내가 사라짐과 동시에 지워져 의미가 없어진다. 앞으로 내가 그어가야 할 선은 어떤 모습일까? 즐거워 춤추듯 흔들리며 앞으로 나아갈까? 아니면 침체돼 나락으로 떨어진 듯 바닥을 구를까? 어떤 모습이든 결국에는 짙은 안갯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의 모습처럼 점점 흐릿해지다가 자취를 감추겠지.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도 나름 의미는 있겠지만,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선 한 줄 그어 흔적을 남김도 괜찮을 것  같다.


아침 출근길에 비가 내렸다.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던 길을 오늘 아침엔 우산 들고 모처럼 걸었다. 한 걸음씩 또박또박 길을 걸으며 앞을 보니 빗방울이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선을 긋고 있었다. 어떤 빗방울은 내 우산을 만나 또르르 구르다가 우산 끝에서 다시 뚝 떨어지며 굵은 선을 그었다.

이 비를 머금고 마른 나뭇가지와 메마른 땅에서는 녹색 여린 잎이 빼꼼히 머리를 내밀 것이다. 빗방울은 선 하나 그어도 잎사귀에 이로움을 주는데, 내가 그어 온 수많은 선들은 어떤 의미를 가졌는가? 반성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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