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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규석 마샹스Machance Nov 14. 2022

계절의 만추(晩秋), 인생의 만추

상무시민공원에 왔다. 근처 결혼식장에서 축하하고 식사를 마친 후였다. 지하 식당에서 수십 가지 음식을 접시에 옮겨 담아와 소처럼 우걱우걱 먹었다. 소가 아니라 되새김질을 할 수는 없으니, 옆에 있는 공원을 찾았다. 일이 바빠서 단풍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도 했고, 소화도 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근처 아파트 단지에 둘러싸인 공원은 주민에게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다행히 공원의 나무는 단풍이 절정에 든듯했다.

11월은 석양과 닮았다. 석양은 하루를 마감하는 때고 11월은 한해 마감을 준비하는 때다. 서쪽 지평선 아래로 뉘엿뉘엿 지는 하루해가 붉은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면 석양 무렵이고, 푸르던  나뭇잎이 붉게 타오르면 만추다. 아는가? 붉은 그림자가 길어질수록 남은 끝이 더 짧아진다는 걸? 11월 중순 이제 가을도 노루 꼬리만큼 남았다.

시인 홍사성은 ‘동지’라는 시에서 노루 꼬리 같은 겨울 해 꼴깍 떨어졌다고 했다.

[노루 꼬리 같은 겨울 해/꼴깍 떨어졌다//그믐달보다 새파란 추위/뼛속까지 깊다//새벽닭 울 때까지는/팥죽 사랑 끓이기 좋은 밤//문풍지 우는 소리에 잠 깨/군불 다시 지핀다.]

시인은 30년 넘게 불교 언론인 외길을 걸어왔으므로 불교에 해박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불교에서 짧은 시간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찰나(刹那)’가 아닌 ‘노루 꼬리’라고 표현했다. 왜 그랬을까? 곰곰이 생각해본다. ‘찰나’는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에서 나타나는 개념으로, 산스크리트어 '크샤나' 순간(瞬間)을 의미한다. 사실 짧고 긴 것은 상대에 따라 다르므로 의미가 없다. 비교할 대상이 없는 상태에서는 길다고 할 수도 없고 짧다고 말할 수도 없다. 노루 꼬리만큼이건 찰나이건 시인은 시간의 길이보다 무상(無常)에 무게를 둔 것은 아닐까?

4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가 정확하게 석 달씩 계절을 나눠 가졌으면 좋으련만, 언제부턴가 여름과 겨울은 길고 봄과 가을은 짧다. 많아서 그 소중함을 모르는 물과 공기처럼 가을과 봄도 석 달로 길면 그 소중함을 모를까 봐 짧아졌을까? 짧은 만큼 얼마 남지 않은 가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인생도 봄 같은 유년기, 여름 같은 청장년기, 가을 같은 노년기로 나눌 수 있다. 가을 같은 노년기 역시 아름답고 소중하게 보내야 한다. 나이 들었다고 옛날만 회상하고 누워 지내서는 안 된다. 무언가 하고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 들판에 홀로 누워 지내는 겨울이 더디 온다. 인생에 있어 가을은, 만추의 시기는 언제일까? 

오늘 눈에 보이는 저 붉은 단풍잎이 내일이면 떨어지고 없을까 봐 조바심이 난다.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매달린 단풍잎을 살펴본다. 살펴보는  순간에도 아기 손바닥 닮은 단풍잎 하나가 ‘툭’ 떨어진다. 지난봄 연두의 청순함도, 지난여름 푸르른 우거짐도, 꽃보다 더 화려한 가을 붉음도 다 버리고 미련 없이 떨어지는 단풍잎이 낙엽이 되는 순간이다. 원 없이 푸르렀고 붉었기에 미련이 없는 걸까? 문득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를 암송한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방금 떨어진 단풍잎을 주워 수첩 사이에 끼워 다. 낙엽도 함부로 밟지 말아야겠다.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귀중히 여겨야 한다. 흙이 된 낙엽이, 인생의 만추 시기를 보내고 흙이 될 나와 만나서 오늘 이 순간의 가을을 이야기할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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