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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10 1945년 멕시코 10센타보

by 동닙

1945년 멕시코 10센타보


구리‑니켈 합금으로 만든 제2차 세계대전기 보통주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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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멕시코 10센타보



•액면가: 10 센타보, 통화 단위는 페소 체계의 보조단위 주화.

•규격: 지름 약 23.5mm, 무게 5.5g, 합금 비율은 동 80%·니켈 20%의 구리‑니켈.

•조폐: 멕시코시티 조폐국(Casa de Moneda de México)에서 주조되었고, 1945년 발행량은 약 9,558,000개로 알려진다.


•앞면: “ESTADOS UNIDOS MEXICANOS”라는 국호와 함께 뱀을 물고 선 선인장 위의 독수리 문장이 들어가며, 이는 멕시코 독립과 아스테카 신화를 결합한 국가 상징이다.


•뒷면: 중앙에 큰 숫자 10과 “CENTAVOS” 표기가 있고, 상단에 연도 1945 및 조폐국 약자 “M”가 들어가며, 주변을 아스테카 태양석(태양력)의 문양을 변형한 장식띠가 둘러싸고 있다.


이 구리‑니켈 10센타보형은 1936~1946년까지 동일 유형으로 발행되었고, 이전의 청동 10센타보(1914~1935)를 대체한 뒤, 1955년부터는 베니토 후아레스 초상이 있는 새로운 청동 10센타보로 교체된다.



전시 금속 수급과 주화 정책


멕시코는 구리·아연·납·은 등 비철금속 산출이 풍부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 등 연합국에 전략 광물을 공급하는 주요 생산지였다.

1940~1945년 사이 멕시코의 아연 생산량은 80% 이상 증가했고, 구리·납·금·은 등 주요 광물도 높은 생산 수준을 유지해 전시 금속 수요에 적극 대응했다.


전쟁으로 세계적으로 니켈·구리 등이 군수 산업에 집중되면서 여러 나라가 동전 금속을 강철·알루미늄 등으로 바꾸거나 크기를 줄였으나, 멕시코는 자체 광물 자원을 활용해 10센타보에 구리‑니켈 합금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는 자원 보유국이라는 구조적 이점을 보여준다.



1945년 경제와 정치 상황

전시 기간 동안 멕시코의 금·외환 보유고는 1941년 말 약 5,400만 달러에서 1945년 말 약 3억4,400만 달러 수준으로 크게 증가했는데, 이는 광물·농산물 수출과 관광 수입, 미국으로부터의 이전소득 증가 덕분이었다.


전쟁으로 소비재·설비재 수입이 제한되면서 국내에는 ‘억눌린 수요’가 크게 쌓였고, 1946년 이후 이 수요가 한꺼번에 분출되며 수입 급증과 외환보유고 감소, 인플레이션 압력이 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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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전시 호황과 전후 조정기 속에서 정부는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을 계속 추진하며 공공투자를 늘렸고, 동전·지폐 발행도 증가했지만, 10센타보와 같은 소액주화는 일상 상거래에서 필요한 실물 화폐 공급을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기능했다.


멕시코는 1942년 독일의 잠수함 공격을 계기로 연합국 측에 공식 참전하여, 미·멕시코 간 군사·경제 협력이 긴밀해졌고, 그 대가로 미국 시장 접근과 기술·자본 유입이 확대되었다.


1945년은 대통령 마누엘 아빌라 카마초(재임 1940~1946)가 집권하던 시기로, 그는 전임 라사로 카르데나스의 급진적 토지개혁 노선을 완화하고, 보다 온건한 중도 노선을 통해 산업화와 대미 협력을 강화했다.


1945년 10센타보는 대량으로 유통된 보통주화라 희귀도는 낮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의 멕시코 경제·정치 상황을 보여주는 하나의 작은 자료로써 의미는 있다.


특히 앞뒷면에 표현된 독수리 문장과 아스테카 태양석 모티프는 혁명 이후 멕시코가 원주민 유산과 근대 국민국가를 결합해 시각적으로 구현한 사례로, 당대의 정치 이데올로기와 문화정책을 읽을 수 있다.



일제강점기 멕시코 한인이주


1905년 인천에서 약 1,000여 명이 ‘고임금·5년 계약 후 귀국’이라는 선전에 이끌려 유카탄 헤네켄 농장으로 떠난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하루 10시간이 넘는 노동과 채찍질, 감금, 상점 쿠폰으로 지급되는 임금 때문에 계약 종료 후에도 탈출과 귀환이 거의 불가능했고, 상당수는 멕시코 혁명과 일본의 조선 병합을 겪으며 귀국할 나라조차 잃은 채 현지에 정착했다.


작은사이즈10.jpg 개인작품. 출판준비<독립운동가의 사진첩> 1942년 멕시코 메리다지방 한인들의 행진


1910년 한일병합 이후 멕시코 한인들은 일본 국적을 강요받았지만, 일본 영사관은 그들을 보호보다 통제 대상으로 규정했다. 멕시코 사회에서는 일본인과 혼동되어 차별을 겪는 일이 잦았다. 이런 변화 속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조선인’으로 규정하고, 학교·교회·상호부조 조직을 만들며 언어와 역사를 가르치는 일을 독립운동의 연장으로 이해했다.

3·1운동 이후에는 미주 전역의 독립운동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멕시코 각지에 대한인국민회 지부와 한인회가 조직되었고, 이 단체들은 모금, 기념식, 연설회를 열어 상해 임시정부와 국내 항일세력을 재정적으로 후원했다.

일부 지도자들은 멕시코 시민권을 취득해 법적 보호와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면서, 그 지위를 이용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고 외교 여론전을 펼쳤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계에 대한 적대가 커지자 한인들은 자신이 일본이 아닌 식민지 조선 출신임을 적극 강조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도 많은 후손에게 한국은 기억과 이야기 속의 조국으로 남았고, 1990년대 이후 ‘애니깽’ 프로젝트 등으로 그들의 이주와 독립운동의 역사가 다시 발굴되면서, 멕시코 한인 공동체는 제국주의와 인종주의, 노동 이주가 교차하는 공간에서 생존과 저항, 그리고 독립의 꿈을 동시에 추구한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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