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초록으로 기억되는 장소...가 있나요? 난 딱히 떠오르는 곳은 없다. 내가 가본 곳 중에는 초록초록한 곳이 딱 생각이 안 난다.
다만... 사진으로 본 발리 우붓의 숙소앞 무성한 나뭇잎... 거기 가보고 싶다. 비까지 내려서 숙소 문을 열면 문앞 가득 푸릇한 잎사귀들이 푹 물에 젖어 흔들리는 모습. 그런 데가 초록으로 기억될 것 같다. 만일 가본다면.
거기 말고는.. 전에 갔던 코타키나발루의 키나발루산이 초록숲에 푹 빠져든 곳이 아니었을까?
차를 타고 비탈길을 털털 달릴 때부터 저 멀리 산에 우림이 빼곡했다. 하루짜리 투어 코스를 예약해서 갔고 손님은 나랑 내 동생, 독일 남자와 일본 여자 커플, 이렇게 네 명이었다. 가이드는 산악인이라는 아저씨. 얼마나 순수해 보이던지. 키나발루 산을 경주하는 대회가 있고 그 기록을 적어두는 게시판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자기 이름이라고 쓱 가리키는 모습이 참 순수해 보였다. 설명도 열심히 해주고 그때 걸었던 모든 길에 정말 초록이 가득했다.
산에 압도당했을 때도 있었다. 아이들 어릴 때 우리집에 차가 없었다.그래서 동생한테 아빠차를 끌고 같이 휴가를 가자고 해서 같이 강원도에 갔다. 경포해수욕장에 들렀다가 메밀국수를 먹고 가리왕산 자연휴양림으로 가기 위해 출발했는데 처음부터 기름을 넣을까 말까 하다가 그냥 가자, 해서 가다보니 목적지에 빨리 도착해야 하는데 길은 왜 그렇게 멀고, 주유소는 안 나오는지. 그리고 점점 어두워지는데 산은 엄청나게 높고 우리는 산과 산 가운데 갇혀서 꼼짝없이 암흑 속에 고립될 것만 같았다. 그때 정말 산이 엄청 크고 '강원도의 힘'을 고스란히 느꼈다. 다행히 마을이 나타나서 주유소에도 들르고 가게에서 먹을거리도 사서 숙소로 들어갔다.
가리왕산은 정말 크고 멋지고 깊은 산이다. 깨끗하고 고고한 분위기는 절로 존경심을 부른다. 그러나 초록으로 기억되는 곳은 아니다. 흙색으로 기억된다. 길이 특히 넓었나?
집 앞에 나무가 있다면... 항상 초록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다음 집은 그런 곳이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