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속14
친할아버지는 내가 고등학생 때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고 한다. 비교적 일찍 돌아가셨지만 기억이 많이 남아 있다.
할아버지는 식물과 물고기를 잘 키우셨다. 마당에 봉숭아가 나무처럼 굵고 튼튼하게 자랐는데 봉숭아물 들이겠다고 조금 뜯으면 그걸 참 아까워하셨다. 또 항상 앉아 있는 안방 자리에 금붕어를 키우셨는데 아주 나이가 많았다. 아랫집에 판 개도 매일 할아버지네 집에 와서 놀다가 갔다고 하고. 동식물을 좋아하셨나보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마루에 서서 먼 산을 바라보며 '70살까지만 살면 좋겠다'라고 하신 걸 들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걸 내가 듣고 어떻게 그게 생각나는지 모를 일이다. 그때 나는 오래 살고 싶은 욕심은 정말 강력한 거구나,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70을 조금 넘긴 후 돌아가신 것 같다. 정확한 연세를 알기 힘들다...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 수 없었다. 할아버지랑 딱히 추억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마음이 냉정해서인 것 같기도 하고.
할아버지는 철도역에 근무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시골집에는 증조부모가 어린 삼촌들을 데리고 살고 할머니랑 할아버지는 큰 아이들 몇 명만 데리고 밖에 나가 살았다고 한다. 거기서 아빠도 고등학교에 다녔다고. 시골집은 방이 세 칸인데 어떻게 증조부모님과 고모할머니들과 작은 할아버지와 삼촌들이 살았을까? 참 미스테리다. 그나마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이들을 나눠서 밖에서 살았기에 가능했던 건지. 옛날에는 정말 방에서 잠만 딱 자고 생활은 마당에서 한건지? 아니면 그냥 다 낑겨 앉아 있었던건지. 아니면 엉덩이 붙일새 없이 다들 바빴던 건지.
할아버지가 어느 날 우리집에 오셨다. 한복 두루마기를 깨끗하게 다려입고 깔끔하게 오셨다. 그때 우리집에 남동생이 태어나서 할아버지가 무척 좋아하셨다. 남동생이 할아버지한테 쉬를 해서 더 좋아하셨던 것도 같고. 할아버지는 한복 입으면 버스에서 사람들이 자리를 양보해주고 한복 안 입으면 양보를 안 해준다고 하셨다. 그때만 해도 젊으셨나보다.
할아버지는 아빠랑 닮은 면도 있는 것 같다. 할아버지도 키가 작고 날씬한 체격이었다.
그렇게 나랑 별로 대화를 해보지 않은 할아버지는 어느 날 쓰러져서 몇달 누워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할아버지에게는 손자손녀가 열여섯 명 있고(지금 세봤다), 그중 손녀는 열 명이다. 할아버지에게 손녀는 어떤 존재였을까? 이름이나 다 외우셨으려나?
있어도 없어도 별 상관이 없는 존재였으려나? 가끔 내가 여자라서 이런 위치에 있는, 아니 이런 위치에 있어야 할 것 같은 본능 같은게 생기기도 한다. 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이익을 가져오긴 애초부터 힘들 테니 해라도 끼치지 않게, 남자들이 상에서 밥 먹을 때 뒤에 조용히 피해 있듯이 그렇게 전면에 나서지 않는 게 여자로서 당연하다고 생각될 때도 있다. 그런 게 시골에서 받아온 질서일까?
당연히 손자들이 태어나서 기쁘셨겠지만, 할아버지는 다른 남자 사촌들에게도 그렇게 친근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좀 독고다이 스타일이었을지도. 정말 나도 아는 게 없긴 하네.
어쨌든 할아버지 하늘에서 편히 쉬세요. 안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