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뭐라고 붙여야 할지는 아직 못 정함
뒷덜미에 두툼한 살집이 뭉쳐 있고 20년 동안 스트레칭이라고는 한 번도 안 했을 법하게 거북목이 심한데다 족히 백 킬로는 넘을 것 같은 엄청난 덩치에 검은 잠바를 걸친 그 사람이 처음에는 음식 배달원인 줄 알았다. 학원 선생님들이 저녁을 시켜 먹는구나... 생각했다. 아니었다. 그 사람은 내가 면접 보러 가는 학원의 원장이었다. 머리가 벗겨진 지 한참 됐고 코와 입을 자주 만지는 통통한 아저씨는 알고 보니 나랑 동갑이었다.
학원은 너무 지저분해서 충격적이었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아무도 앉지 않을 것 같은 오래된 인조 가죽 소파가 한 세트 앉아 있고 학원 문을 열고 들어가면 여기저기 놓인 제각각의 테이블에 문제집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고 파일, 상자, 프린트물 같은 잡동사니가 잔뜩 어질러져 있었다. 나도 그렇게 깨끗한 사람이 아니지만 그렇게 지저분한 학원은 처음 봤고 애들이나 학부모가 그런 걸 보고도 다닌다니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원장이라고 하는 남자를 따라 원장실에 들어가서 원장을 마주 보고 의자에 앉았다. 원장은 내 이력서를 엄청나게 꼼꼼히 본 것 같았다. 나한테 ‘안양에 살았었죠?’하고 물어보면서 자기가 좀 촉이 좋다면서 여러 가지를 계속 물어봤다. 생일이 빠르냐고도 물었다. 내가 96학번인데 78년생인 걸 보면 생일이 빠른 거 아니냐고. 계산을 참 잘하나... 했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도 96학번이었기 때문에 알고 있었던 건데 그걸 가지고 자기 촉이 빠르다고 하고 거기에 또 인정하는 제스처를 해 준 나는 또 뭔지.
좋아한다고까지는 할 수 없었지만 좋게 생각하던 가수가 불법 군 면제로 실형을 받았다는 기사를 보고 참 안타까웠는데, 이상하게 내가 좋아하는 남자 연예인이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얼마 전에도 재미있게 보던 드라마의 젊은 남자 주인공이 학폭으로 연예계에서 매장됐고 예전에 뺀질거리지만 다재다능해서 재밌다고 생각한 개그맨 한 명도 성추행 사실이 밝혀져 소리 없이 사라졌다. 이쯤 되면 내가 정말 남자 보는 눈이 심하게 삐었을까, 걱정스럽고 그럼 남편은 어떻게 된 건가 싶기도 해서 불안해진다. 다행히 내가 좋아한 연예인 중에 오정세가 있어서 내가 타율이 제로는 아닌 것 같지만 내가 뭐가 잘못된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때 만난 이 원장도 어떻게 된 사람인지 가끔 의아할 때가 있다.
면접을 보면서도 계속 도발적인, 또는 도발적이라고 의식하는 질문을 던지더니 수능 시험 문제를 하나 주면서 시간 좀 줄 테니 설명해 보라고 했다. 15년 전쯤 재수생 과외 할 때 본 이후로 수능 영어 문제를 처음 풀어본 거라 그런지, 아니면 그동안 문제가 너무 어려워졌는지 정말 읽어봐도 알쏭달쏭한 지문이었으나 워낙 잃을 게 없다는 생각으로 본 면접이었기 때문에 열심히 해설을 했고 원장은 ‘선생님 영어 잘하시네요.’라고 했다. 그때 원장은 제법 절제된 원장의 모습을 연기했던 것 같다. 나중에 ‘선생님 그 문제 틀렸었잖아요.’라고 한 걸 보면. 나는 그 문제를 제대로 못 풀었다고 한다. 집에 와서 남편에게 보여줬는데 남편도 모르겠다고 했으니까 문제가 워낙 복잡하고 꼬여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굳이 다시 찾아서 볼 생각도 없이 문제지는 버렸다.
원장은 면접 볼 사람이 몇 명 더 있으니까 밤에 연락해 주겠다고 했고 다음날 일어나 보니 과연 연락이 와 있었다. 열심히 해달라고. 야호. 하지만 무려 입시 영어를 가르칠 수 있을까 걱정도 돼서 마음이 아주 기쁠 수만은 없었다.
원장은 바로 다음 날 수업에 대해 이야기도 하고 잠깐 가르쳐 보러 와 보라고 했다. 그래서 또 내가 가지고 있던 옷 중에 비교적 깔끔한 니트 티와 검은 슬랙스를 입고 학원에 갔다. 원장은 아이들을 인사시켜주더니 교재를 주면서 바로 가르쳐 보라고 했다. 아이들은 세 명이 있었고 나는 아이들 이름을 칠판에 쓴 후 친근하게 보이려고 노력하면서 교재를 펼치고 수업을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서 문제집을 처음 봤기 때문에 미리 공부를 할 수 없었고 수능 유형에 대해서도 전날 급하게 알아본 게 전부라서 문제를 보면서 나도 배우고 있었다. 문제집은 수능 유형별로 기출 문제와 변형 문제가 나와 있는 형식이었고 나는 아이들에게 돌아가면서 문장을 해석해 보게 했다. 결국 이 방법에 아이들은 기가 찼는지 절대 나랑 공부 안 하고 싶다고 했단다. 원장은 이런 반응을 나름 순화해서 아이들이 문장 한 줄씩 독해하는 방식이 너무 FM적이라 싫어한다고 문자를 보냈다. 나는 물론 크게 마음이 상했다. 하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내가 수능에 대해 모르는걸. 수능 공부하는 아이들은 영어 발음이 좋아야 할 필요도 없고 단어를 읽을 줄 알 필요도 없다. 그냥 뜻만 알면 된다. 내 잘못을 시인하고 다음에는 좀 더 전략적으로 가르쳐 보겠다고 했다. 정말 내가 믿는 건 내 영어 실력과 아이들 가르치겠다는 성실함뿐이라 형식을 몰라서 실수한 건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건 충분히 바꿀 수 있는 문제라고도 생각했다. 원장은 내 이런 패기가 마음에 들어서 나를 고용했다고 한다. 다른 면접 본 후보 강사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다른 학원 강사들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일할까, 정말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