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남의 손에 코 풀어
연말에 옛날 드라마 <청춘의 덫>을 열심히 봤다.
너무 착하고 올곧고 순수한 윤희(심은하)가 너무 좋았고 망나니였지만 점차 정신 차리는 노상무(전광렬)도 보기 재미있었고 무엇보다 윤희가 같이 사는 사촌동생, 할머니, 이모의 짝짝꿍이 너무 찰지고 따뜻하고 재미있었다.
윤희는 7년 동안 충성하고 바라보던 남자에게 그야말로 '버림'받는다. 남자는 재벌집 딸과 약혼하고 자신은 호적에도 올리지 못한 딸과 남는다.
이때만 해도 같이 다니던 회사도 옮기기로 결심하고 그저 곱게 보내주기로 한다. 그러면서 어느 날 이모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런 멍청한 나라도 사랑하지? 너무 쓸쓸해 죽겠어"
그러자 이모는 이렇게 말한다.
"나 또 대성통곡하는 거 보고 싶어?"
이렇게 따뜻한 이모와 조카. 별로 대단할 건 없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너무 정감이 갔다.
그러다 딸이 사고로 죽고 장례까지 치르는 동안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도 아이 아빠가 오지 않자 윤희는 독을 품기 시작한다.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윤희는 딸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도 오지 않은 남자를 비난하고 남자는 '위독하다'고 했지 죽었다고 안 해서 안 온 거라고 변명한다. 마치 "프렌즈"에서 레이첼은 남자가 바람 피웠다고 비난하고 남자는 "우리 헤어진 상태였어"하고 변명하는 거랑 비슷한 건가......
윤희는 남자를 부숴버리겠다고 독설을 내뱉고 회사를 옮기지 않은 채 계속 다니면서 불편함을 선물처럼 계속 날린다. 그러다 회사를 물려받기로 되어 있는 노상무라는 놈팽이의 대시를 받는다. 놈팽이는 윤희라는 아름답고 고결한 여인의 성품에 감화되어 점점 좋은 사람, 원래 자신이었던 유능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변모하고 윤희는 처음에는 복수의 도구로 노상무를 이용하려던 마음을 바꿔 그의 사랑에 마음이 녹는다.
두 사람은 결혼하고 행복하게 산다. 노상무의 집에서 어머니, 할머니에게 효도하면서 아이 낳고 알콩달콩 예쁘고 화려하게.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예뻐하고 부부는 서로 사랑한다. 재벌집의 안주인으로 살아가는 행복한 결말이다.
20년도 넘은 이 드라마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부숴버릴 거야' '신발이라도 되겠어요' '사랑하기 시작했어요' 같은 심은하의 대사는 나도 실시간으로 본 기억이 나고 다시 봐도 재미있었다. 심은하의 얼굴 자체가, 그녀의 목소리와 정갈한 대사와 보석같은 성품 자체가 보는 즐거움을 줬다. 저절로 '맞아, 착하게 살면 저런 보상을 받을 수 있어'라는 생각이 든다. 나태한 마음 버리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
하지만.... 행복한 결말을 다 본 후에도 약간 찜찜한 기분은 남는다.
우선, 왜 윤희의 복수는 저렇게 수동적인가? 복수를 하겠다고 했지만 정작 노상무가 윤희에게 다가오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윤희는 아이까지 낳고 살았던 자신의 과거를 딛고 새 남자를 만나기 위해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고 그저 모든 게 괜찮으니 나에게 오시오, 라는 재벌 2세를 받아들이기만 했다. 물론 욕심이 눈이 멀어서 어리석은 행동을 하거나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면, 또 노상무라는 사람이 흠집이 없는 사람이라면(첩의 자식, 이혼 경력, 여성 편력, 지독한 불성실함) 재벌의 반대에 부딪혀 결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연적인 요소가 너무 많은 사랑이다.
둘째로, 왜 재벌과 결혼해서 그집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여자의 복수가 되는가? 많은 드라마 주인공들이 부잣집 남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산다. 물론 윤희의 진정한 행복을 의심하지 않는다. 윤희는 행복해야 마땅한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 행복이 재벌가에 시집갔기 때문에 나온 행복이라는 데서 의심이 든다. 윤희는 어쩌다 보니 사랑하게 된 남자가 재벌이어서 이렇게 된 거지, 나는 욕심없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샐러리맨과 평범하게 사는 결론이라면 복수하는 즐거움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 복수에 성공하는 사람은 물질적인 보상이 아니라 자신만의 소박한 행복에서 오는 진정한 삶의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인 것 같다. 복수도 때로는 필요하다. 나와 내 공동체에 해를 입힌 사람에게 응당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 정의 실현이 된다. 아우구스투스도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의 손에 죽었을 때 복수를 다짐하면서 황제의 여정을 시작했고 그 초심을 잃지 않고 나라를 재건하며 팍스 로마나를 열었다. 하지만 사심을 채우려는 복수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복수였다.
그런 면에서 시대 변화가 보인다. 이제 여자가 재벌과 결혼하는 게 드라마의 대세는 아닌 것 같고 남자를 등에 업고 뭔가 해보려는 여자 주인공도 많지 않아 보인다. 이제는 여자들이 대성하거나 극악한 빌런으로 등장하는 일도 많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이 한 사람의 마음을 녹이고 고귀한 내면을 드러낸다는 점에 동의한다. 이런 찜찜한 요소들을 모두 덮을 정도로. 한 사람을 이해하고 감싸는 건 그만큼 힘든 일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 자기 자신을 갈고닦아 깨끗하고 맑은 사람이 되는 것이 힘든 일이다. 그래서 도전할 만한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