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믿어주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요?
믿음은 행동에서 생긴다.
미래는 알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음, 변한다는 말이 정확하게 들어맞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미래가 어떤 모습으로 내 앞에 펼쳐질지, 그 속에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그 미래가 현재가 되어보지 않고서야 알 수 없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어떤 대상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당연하게 그렇게 할 것이라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이라면, 그 '믿음'이란 것은 그 대상이 보여줬던 그간의 행동에서 나온다 말할 수 있으리라.
'당신을 정의하는 것은 당신의 감정이 아니라 행동이란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스토아적 삶의 권유'라는 책에서 나오는 문장인데, 나에게 이 말은 감정에 치우친다는 것이 어떤 잘못된 행동의 타당한 이유가 될 수 없으며 그런 소용돌이치는 감정 속에서도 선택한 행동이 진정한 자신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감정은 많은 부분 통제 불가능 한 면이 있다. 좋지 않았던 감정을 다시 불러오지 않기 위해 노력할 수 있으나 이미 일어난 감정을 없던 상태로 되돌린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에 그 대상이 보여줬던 일관된 행동만큼 믿음을 주는 일은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렇게 했던 수많은 흔적들과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던 반응들이 다음번에도 늘 그럴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 다른 이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이 예상치 못한 일을 한다면 그건 실망이 아니라 오히려 걱정을 불러올 것이다. 그 사람을 탓하기보다는 혹시 그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고려할 것이다. 그간 보여줬던 믿음으로 그의 행동은 무작위 한 행동의 어느 하나가 아니라 예외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자신(自信)'은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다거나 어떤 일이 꼭 그렇게 되리라는 데 대하여 스스로 굳게 믿는 것'이다. 앞서 한 이야기에 이어보자면, 자신감은 내가 그동안 해 온 행동으로부터 비롯되겠지.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선택하리라는 믿음은 자신과의 무수한 약속들을 지켜낸 과거의 어느 순간의 '나'들로부터 나온다. 기도는 알 수 없는 미래로부터 오는 두려움을 쫓고 용기를 구하는 행동이다. 힘이 들 때, 나 스스로에게 외는 기도문이 있다면, 그중 하나는 '나는 결국 해내는 사람'이다. 이 말이야 말로 자신을 온전히 믿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첫 시작은 '믿고 싶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반신반의로 시작한 행동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고, 그것이 또 다른 용기의 밑거름이 되어 또 다른 결실을 맺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엔 '결국 해내는 사람'이 남는다. 결국 이 기도는 그 스스로에 의해 이루어진 셈이 된다. 물론 그 과정이 어찌 기쁘고 행복하기만 하겠는가. 숨이 끊어질 것 같이 기쁠 때도, 그냥 어느 바닥에라도 쓰러져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겠다. 하지만 그는 믿었을 것이다. 결국 해냈던 그를, 결국 해낼 그를.
물론 모든 믿음이 100% 어떤 결과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이 나왔을 리 없지.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심지어 번번이 나를 속이는 자신을 마주하는 것보다는 '나를 믿어주고 실천하는 나'가 훨씬 낫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작은 성공의 경험들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것 같다. 그리고 성공을 위한 실천을 특별하게 여긴다. 매일 밤, 안온한 하루의 일상을 지켜낸 용사에게 경의를 표한다. 누군가 네 성공은 너무 작고 평범하다고 말한다면 친절하게 말씀드리고 싶다. '제 인생 대신 살아주실 거 아니면 피곤하게 하지 말고 가시던 길이나 가세요.'
자신(自信)이 있으려면 자신(自身)이 있어야 한다.
내가 지켜내고 있는 것이 내게 얼마나 가치 있는지는 나만 잊지 않으면 된다. 나는 나만 믿으면 된다. 물론, 가끔 까먹을 때도 있겠지. 그땐, 때론 나보다 나를 더 믿어주는 것 같은 소중한 존재들에게 살짝 기대도 좋다. 그들의 기억 속에 사는 내가 새로운 용기를 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