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lty 下
두 명이 마주 보고 앉으면 아늑하게 딱 맞는 이 공간은 일주일에 한 번, 매일이 겨울처럼 차가운 이 세상에서 드물게 온전한 환대를 받는 곳이다. 오늘도 정해진 시간에 맞춰 자리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근 찻잎의 향긋함이 은은하게 이곳을 채웠다. 그리고 잠시의 고요를 두고 마주 앉아있던 여성의 부드러운 음성이 이어졌다.
“그때 마음은 무엇이었을까요?”
“글쎄요. 너무 옛날이라.”
따뜻한 향긋함에 입을 살짝 대었다 뗐다. 여성은 그때의 마음을 물었다. 그때라 함은 어린 내가 일생일대의 선택을 앞두고 있었을 적이었다. 이 세상은 근 19년을 원치도 않은 것들을 달달 외게 했으면서, 이제 와서야 인생은 너의 것이라며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라지 않는가. 그동안 무언가를 골라본 적이 많지 않았다. 성적에 맞추어, 사정에 맞추어. 그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곳에 가는 무리에 섞여 튀지 않으려 애썼기에, 갑작스러운 선택지 앞에서 내 마음을 마주한다는 것은 너무도 익숙지 않은 일이었다. 글쎄. 여태껏 마음을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그때의 마음을 기억해내려는 노력은 오랫동안 쓰지 않아 녹슨 기계가 끼익 소리를 내며 움직임을 시작할 때처럼 버거웠다. 그리고 그 버거운 움직임으로 한참을 거슬러 갔다.
생각해 보면 그 이후에도 꽤 오랜 시간,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나에게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여러모로. 하나를 완수하면 곧바로 이어지는 게임 퀘스트처럼 나에겐 늘 주어진 분수가 있었다. 이 세계에서 절대 로그아웃하게 하지 않으려는 제작사의 대 계획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에게 들어맞았다. 나는 참 성실한 유저였다. 뭐에 충성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헌신하는. 사실 몇 마리의 몹을 잡으라든가, 빌런을 마주 하라든가 하는 매번의 과제들을 착실히 해내는 것은 나에게 이 세계에 걸맞은 몫을 해내고 있다는 안도감을 주었다. 그리고 때로는 성취감도 주었다.
그래, 게임으로 치자면 나는 막 다음 스테이지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새로운 단계로 나아간다는 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물론 이게 정말 게임 이야기였으면 까딱 잘못된다 한들 들인 시간이 아깝더라도 아이디를 새로 만들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이 인생이란 게임은 캐릭터 삭제도 불가능한데 손에 들린 목숨은 단 하나뿐이다. 누가 만든 건지 참 난도가 극악이다. 매일 목숨 줄을 부여잡고 덜덜 떨며 걷다가가 거울 속에서 녹슨 나를 발견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녹슬고 있었지. 손가락을 꼽아 세월을 헤아려 봤다. 접힌 손가락의 끝에는 가느다란 목숨 줄처럼 가느다란 물음이 매달려 있었다.
‘너 누구니?’
불렸던 이름은 많았다. 어디에서나 필요한 존재이고 싶었으니까. 그들이 불렀던 이름은 ‘나의 것’이긴 했지만 ‘나’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나는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낡아가고 있었다. 그동안 나를 움직였던 안도감과 성취감은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있기를 바라는 누군가가 건네는 달콤함일 뿐이었으니까.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접속해 있던 세계의 전원이 꺼졌다. 눈앞을 암흑이 채웠다. 여긴 어딜까. 돌아갈 곳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마구 울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주 오래전 두고 온 꿈을 발견했다.
“잊혀진다는 것, 당연하다는 걸 알면서도……기다렸어.”
“네가 여기 남아있는 줄 몰랐어. 사라진 줄로만 알았어.”
“내가 어떻게 그래.”
“내가 너무 달라져 버렸으니까. 널 다시 찾지 않았으니까.”
“결국, 다시 찾아왔잖아.”
“나한테 그럴 자격이 있을까?”
“네가 자격이야. 날 만든 게 너니까.”
한참을 더 울었다. 오랜만의 재회의 순간에 머물렀다.
널 떠나 헤맸던 것은 나였다.
- '애청곡 가사 각색하기'를 주제로 쓴 글입니다.
- 각색한 노래는 '데이먼스 이어'의 'Salty'입니다.
- 이전에 올렸던 '당연하단 걸 알면서도(Salty上)'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