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 하나 이고 지고 산다.
아이들과 바람 쐬고, 갯벌 구경도 할 겸 영종도에 갔다. 썰물 시간에 맞춰 도착한 해변엔 사람들이 벌써 여럿이다. 버려도 되는 낡은 옷을 대충 입고, 운동화에 슬리퍼 따위를 신은 차림은 누가 봐도 갯벌 초보였다. 재미 삼아 한번 온 거라 장화는커녕 조개 캘 호미조차 없었다. 아이들 손에는 모종삽과 모래 놀이용 플라스틱 통이 전부였다. 조개가 어디서 나오는 줄도 모르고 그저 부지런히 파댔다. 겉면보다 속이 더 꺼먼 펄을 몇 번 퍼 올리고 나니 이내 지쳐버렸다. 맨질맨질한 갯벌에 생채기만 내고는 조개 캐는 것을 포기했다.
아이들은 갯벌 곳곳에 모여 있는 소라게로 관심을 돌렸다. 이름은 소라게여도 몸에 지닌 껍데기는 다 달랐다. 갯고둥 껍데기를 진 것, 소라껍데기를 진 것, 골뱅이 껍데기를 진 것. 소라게는 저마다 다른 모양, 다른 색깔 껍데기를 버젓이 지고 갯벌을 점잖게 기어 다닌다. 손가락 끝으로 톡 건들면 화들짝 놀라 껍데기 속으로 쏙 들어간다. 잠자코 기다리면, 소라게가 슬며시 머리를 내밀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이번에는 아까보다는 잰걸음으로 바위 뒤로 숨거나 돌멩이 사이로 파고든다. 소라게의 거동이 우습기도 하고, 색색이 조그마한 껍데기가 귀엽기도 하여 옹기종기 모여 소라게 하는 양을 구경했다.
한 마리 잡아 손바닥에 올려놓고 요리조리 뜯어보던 딸아이가 소라게를 통에 넣었다. 다른 아이도 얼른 제 몫으로 들고 있던 플라스틱 통에 소라게를 잡아넣었다. 소라게는 잡아 뭐하냐고 보기만 하래도, 아이들은 들은 척도 안 한다. 선사 시대 채집 본능이 꿈틀 했던 것일까, 빈 통을 소라게로라도 채우고 싶었던 욕심이었을까. 소라게를 잡느라 아이들의 손이 분주하다. 소라게가 등에 진 집은 바다의 적들에게서 숨을 때나 쓸모가 있었다. 물 빠진 갯벌에서는 눈에 띄는 것은 물론, 아이들 손엔 무방비였다. 공깃돌만 한 크기가 집기에 편했다.
어느새 아이들 플라스틱 통이 소라게로 그득 찼다. 자유로이 노닐던 소라게들은 느닷없이 붙잡히어 수용소에 갇혔다. 이게 웬일인가 싶어 눈만 끔뻑이는 소라게가 있는가 하면, 서로 부딪치어 뒹구는 소라게들도 있었다. 한 마디로 난장판이었다. 아이들은 그 좁은 틈을 비집고 커다란 소라껍데기와 돌멩이를 담았다. 제 딴엔 갯벌 환경과 비슷하게 맞춰 준 것이다. 아무래도 소라게를 집에 데려가 키울 심산이다. 집에서 키울 수 없으니 모두 다시 풀어주라고 했다. 집에서 갯벌 환경을 조성해 줄 수 없는 까닭도 있지만, 자연에 있던 생명체는 원래 살던 곳에 있어야 잘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모았다. 자기네가 수조 청소하고 먹이도 주고 물도 갈아 주겠다고 했다. 집에 강아지나 고양이가 없으니 반려 소라게를 들이면 어떻겠냐고 졸라댔다. 감염병 확산으로 오랜 기간 학교도 못 가고 집에 있는 아이들이 안쓰러워, 여느 때라면 단호하게 거절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집에서 키우는 방법을 검색해 보겠노라고 했다. 작은 돌멩이, 해수염, 먹이 등이 필요했다. 주문을 마치고, 각자 열 마리만 남기고 풀어주라고 했다. 그렇게 소라게 스무 마리가 집으로 오게 되었다.
갯벌에서 주워 온 커다란 소라껍데기와 돌멩이를 수조에 놓고 해수염을 탄 물을 수조에 부었다. 수조에 풀어준 소라게들은 처음엔 어리둥절하여 꿈쩍 안 하고 있었다. 몇 분을 뜸 들이다가 돌멩이 위에 올라가거나 헤엄을 쳤다. 아이들은 아예 배를 깔고 누워 소라게가 움직이는 모습을 관찰했다. 사진을 찍어 보내며, 친구들에게 자랑했다. 소라게가 수조 안을 탐색하느라 활발히 오가는 것을 보고 갯벌에서 데려온 미안함이 조금 가시는 듯했다. 잘 시간이 되어, 형광등을 껐다. 어둠이 자욱이 깔린 거실에 달그락거리는 소리, 바지런히 움직이는 소리가 한동안 계속됐다. 별일 없을 거라 믿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 거실에 나가니 비린내가 진동했다. 소라게 몇 마리가 죽었다. 죽은 소라게 모두 집을 나와 자신의 몸을 외부에 고스란히 드러냈다. 살아있을 때 껍데기 밖으로 보이는 머리 부분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형체였다. 배까지 온전히 드러난 몸체는 전갈과 비슷했다. 배엔 다리가 없었고, 자기가 지고 있던 껍데기에 맞게 나선형으로 말린 모양을 하고 있었다. 갑각류라기보다는 연체류같이 말랑해 보였다. 죽은 소라게들을 수조에서 꺼내어 놓았다. 아이들은 코를 막고 다가와 소라게 사체를 보았다. 소라게가 불쌍하다며 얼른 흙에 묻어주란다. 죽은 것이 끔찍했던지 제 손으로 하지 않고 엄마 손을 빌렸다. 비닐봉지에 화분용 상토를 채우고 소라게 사체를 묻어주었다. 이때까지는 물에 적응하지 못한 몇 마리가 죽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라게 사체는 다음날에도 계속해서 생겼다. 몸을 감싸는 포근한 펄도, 청량한 파도 소리도 없는 곳. 수조 안은 소라게가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갯벌에서 주워온 부속물로 위장만 했을 뿐 갯벌이 아니었다. 애당초 집으로 잡아 오지 말아야 했는데, 잠깐의 욕심에 애꿎은 생명이 죽어 나갔다.
하나같이 집을 나와서 죽는 모습이 같다. 소라게는 마지막 순간엔 꼭 집을 비워두었다. 안간힘을 써서라도 집을 나온 까닭이 뭘까 생각했다. 작은 몸으로 단단한 껍데기를 짊어지고 다니느라 힘들어서 벗었다고 추측했다.
“평생, 이고 지고 한 집이 무거워 나오는가 보다.”
나름대로 짐작한 바를 아이들에게 말했다. 큰아이가 고개를 저으며 방영 애니에서 들은 이야기를 꺼냈다.
“소라게는 다른 동물의 껍데기를 집으로 삼잖아요. 죽을 때 벗어놓아야 다른 소라게가 들어가서 집으로 삼을 수 있어요. 그게 소라게의 규칙이래요.”
본디 빌려 쓴 물건이니 떠날 적에 도로 내어놓고 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가 보다. 소라게는 제 몸집이 더 커졌을 때 새집을 구한다. 제 몸집에 딱 맞는 껍데기를 구하기가 쉽지는 않다. 갯벌에 널린 것이 고둥 껍데기일지라도 몸에 맞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새로 찾은 껍데기가 제 몸보다 크면 벗어놓고 원래 지녔던 집을 다시 몸에 걸친다. 그러고는 알맞은 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다른 소라게도 와서 입어보고 맞지 않으면 벗는다. 역시나 다른 소라게를 기다린다. 마침내 빈 껍데기가 몸에 딱 맞는 소라게가 나타나면 빈집은 주인을 맡는다. 새집을 찾은 소라게는 저가 쓰던 집을 과감히 벗어놓는다. 그럼 주변에서 기다리고 있던 소라게들이 일제히 집을 벗고는 몸에 맞는 새집으로 갈아타기를 한다.
각자가 제 몸에 작은 집은 남 주고, 불어난 몸에 맞는 집을 찾아 쓴다. 갈아타기 행렬의 끝엔 작은 집 한 채가 남는다. 작은 집은 언제고 더 작은 소라게의 몫이 될 터이다. 그렇게 몸집에 맞게 옮겨 다니다 수명이 다하여 죽게 될 즈음엔 집에서 나와 맨몸이 된다. 그럼 그 집은 다른 소라게가 차지한다. 갯벌에 고둥 껍데기가 부족하면 소라게 사이에 경쟁이 치열하겠지만, 아무리 경쟁이 치열하여도 어느 하나가 독차지하는 법은 없다. 저마다 빌려 쓰고 빌려주기를 반복한다.
서울에 아파트 한 채 마련하겠다고 아등바등 돈을 모으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보니, 사람들도 소라게처럼 산다. 알뜰히 모아 사기에는 턱없이 오른 집값을 은행 대출로 겨우 댄다. 매달 숨이 탁 막히는 대출 원금과 이자를 갚아나가는 모습이 무거운 집을 지고 사는 소라게와 다를 게 무엇인가 싶다. 버겁고 힘들더라도 비바람 피할 집 한 채는 필요하니 어쩔 수 없이 이고 진다. 소라게가 제 몸을 보호할, 튼튼한 껍데기를 찾듯이 사람도 편안히 거주할 집을 찾는다. 하지만, 갯벌의 생태처럼 집을 소유하는 것이 반드시 순리대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소라게는 몸에 지닌 한 채 외에 더 가진 게 없지만, 사람은 더 많이 있거나 아예 없기도 하다. 남이 살 집까지도 잔뜩 쟁여 두고 집세를 거두거나 매매 차익을 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채 집이 없어 식솔들과 이 집, 저 집 옮겨 다녀야 하는 사람도 있다.
갯벌 생태에 흐르는 자연의 이치는 인간 세상에서는 탐욕에 막힌다. 때로 규제의 벽에 부딪히기도 한다. 공급이 과하여 미분양이 나거나, 공급이 부족하여 전세가 및 매매가가 폭등한다. 필요에 따라 집을 짓고, 필요하지 않은 집은 내놓았으면 순조로웠을 일이다. 모두에게 한 채씩 돌아간다면 다툼이 없을 것 같지만, 사람의 욕망이 더 나은 집, 더 넓은 집을 찾아 헤매게 한다. 집을 두고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요즘처럼 집값이 폭등하면 집이 많거나, 없거나, 한 채 있거나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집값에 혈안이 된다.
정부가 이를 다스린다고 규제에 규제를 덧칠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사람의 욕심은 줄지 않았는데 규제로 인해 아파트를 새로 짓는 것도, 파는 것도 어려워졌다. 그러자 공급 부족으로 집값 상승 곡선이 가팔라졌다. 한 푼 두 푼 모아 집을 사려고 했던 사람은 닭 쫓던 개가 되었다. 집 한 채를 두고 만족하며 살았던 사람은 자기 집값의 변변치 못한 성적에 풀이 죽고, 그마저도 없는 사람은 앞으로도 집은 사기 글렀다는 생각에 잠 못 이룬다.
겹겹이 덧칠한 규제를 벗겨낸다면 집값이 안정될 수 있을까. 사람의 욕망이 끝없이 더 많은 것을 바라는데 가능할까 싶다. 소라게의 사체를 묻어주며, 기대어 살 집이 있음에도 어쩐지 초라해졌던 마음을 되짚어 보았다. 소라게가 벗어놓은 고둥 껍데기와 남은 소라게들을 바다에 돌려주었다. 이따금 욕심과 질시에 눈이 흐려질 때면 갯벌의 소라게를 떠올린다.